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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적 여행기

[230218~230223, 홋카이도 (4) ] 난 확실히 같이 즉흥 여행하기 좋은 스타일은 아니다

가끔은 잊어버릴 때도 잊지만
약속해 절대 잃어버리지 않아
맘 한켠에 영원히

모네토, <Classic (Feat. MRCH)>

 

홋카이도의 중소 도시를 발로 우당탕탕 걸어다닌 뒤 다시 삿포로로 돌아가는 자라.

 

 

9. 여행 와서 의외로 못하는 것,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아까워하지 않기

 

사진만 봐도 눈이 부시는 여행 4일차의 아침
호텔 조식은 가볍게 거르고, 몸을 지지고 나와서 먹는 아점 식사

 

아침 7시, 호텔 창문의 암막 커튼을 걷은 지 10초가 채 되지 않아 눈이 너무 부셔 결국 다시 치고 말았다.

전에 없이 맑은 하늘과 따가운 햇볕에 반짝이는 눈. 선글라스를 챙길 걸 그랬다, 라고 조금 후회했다.

 

아무리 걷는 걸 좋아해도 혹시나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돌아다니면 안되는 거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날이라면 또 모를까.

호텔 방에 욕조가 있었다. 오전에는 구시로에서 술을 마셔서 못했던 온천 대신에 물이라도 받아서 뜨끈하게 좀 지지자 싶었다. 전날 돌아다녔던 걸 생각해보면 딱히 오비히로를 더 돌아다닐 필요도 없을 것 같고.

 

삿포로로 돌아가는 기차는 오전 11시 정도. 보통 11시에 문을 여는 식당들의 관행을 보면 아무래도 방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기차를 몇 시간 정도 더 늦게 예약했다면 맛있는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다음날엔 오타루에 다녀와야 했기에, 그랬다면 삿포로를 구석구석 보기 어려웠을 거다. 게다가 방에서 역 까지는 걸어서 3분 정도 걸리니,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것 같은 플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연유로, 체크아웃을 했을 때는 10시 40분 정도였다.

 

 

나름대로 시린 공기와는 달리 햇빛과 눈 때문에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와오 라임

일부러 딱 맞춰 나왔기에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승차장으로 향했다.

 

오비히로 역에도 코인락커가 있었다
이번에 탈 열차는 삿포로행 토카치 6호 열차. 11시 08분 출발 열차다

 

전날 오비히로 역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역사 안은 꽤나 북적북적했다.

 

한국 물가 반성하자
역시 생수는 PB 상품

 

처음 일본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무지성 우측통행으로 역주행 빌런이 되기 십상이었는데 어느새 자연스럽게 좌측보행을 하고 있었다.

생존 습관 +1

 

날씨가 정말 최고였다
내가 탈 토카치 열차

 

사진이 깨끗하게 찍혀서 기분이 좋았다. 이런 날씨라면 한 나절이면 이 눈이 다 녹겠다 싶었다.

 

탑스응

 

분명 구시로로 갈 때 탔던 열차와 같은 노선인데. 앉아서 본 창 밖의 풍경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구시로 갈 때와는 다르게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오비히로 뒤쪽으로 보이는 산. 입체감이 조금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저 멀리에 산이 있었는 줄도 처음 알았다.

 

창문이 조금만 더 깨끗했더라면

 

기가 막히는 장면이었다. 이걸 못봤다면 홋카이도를 또 오해할 뻔 했구나.

 

나무의 저 허연게 눈이 아니라면 자작나무가 맞겠지?

 

한 번씩 눈앞으로 쟤들이 튀어나와서 차창 밖의 화면에 잡음을 띄우는데, 잠깐의 노이즈만 견디면 다시 저 멀리의 설원과 설산, 파란 하늘 화면이 정상적으로 수신된다.

웬 방해꾼들이 내 눈 바로 앞에서 내 감상을 방해해도 그건 잠깐인데다 난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별로 개의치 않는다.

 

 

마침 시선 바로 앞에서 딱 정차하길래.
스키장...이 있었구나.
이구이 님의 일구구이 앨범 디게 좋아용

 

풍경은 너무 좋았지만, 맨 눈으로 보다간 눈이 정말로 다칠 것 같아서 블라인드를 내리고 그냥 라디오를 켰다.

 

TMI) 홋카이도의 특급 열차에는 한국의 KTX와 다르게 블라인드가 반으로 나뉘어 있어 뒷사람이나 앞사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다. 확인해보고 필요하다면 쿨하게 내려버리자.

 

평일 애매한 시간이라 빈자리가 많긴 했다
이틀만인데 되게 오래된 기분

 

다시 삿포로에 도착했다.

묘하게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나랑 관련이 있는 열차는 아니지만 그냥 플랫폼 낭만
뭔가 날씨가 너무 맑아서 좀 낯설면서도, 서울같은 익숙함이 느껴졌다

 

믿기지 않는 기온이었다. 이게 영하 2도라고?

햇빛이 강하고 바람이 서울보다는 덜 불어서 그런지 당장 패딩을 벗고 돌아다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번 숙소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틀 동안 묵을 숙소였다. 이른 체크인이 가능했기에 바로 짐부터 던져 두기로 했다.

삿포로니까 영어가 잘 통하...겠지? 써도 되는 걸까?

며칠간 영어보다 일본어를 훨씬 많이 썼더니 이상한 쪽으로 영어 울렁증이 생겨버린 자라였다.

 

삼계탕 매앤
오늘의 집

 

역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스스키노 역 근처의 호텔이었다.

갑자기 사진도 없어지고 성의도 없어진 건 첫 날 와서 봤던 장면이랑 똑같은 장면이라서 그렇다.

 

로비
웰컴 드링크와 어매니티들 잘 챙겨서
방으로 입성

 

오늘 한 일이 호텔에서 호텔로 이동한 것 뿐이라니. 출장인가 싶었다.

넓은 데서 바로 들어와서 아무래도 좁게 느껴지긴 했지만, 삿포로잖아. 일반적인 일본의 비즈니스 호텔 치고는 적당한 편이었다.

 

와이파이가 되는 데서 저녁을 어디서 먹을지 검색을 좀 하다 보니까 오후 3시가 되었다.

사실 삿포로에서는 따로 가보고 싶은 곳이 없었다. 여행 취향에 인디병이 약간 걸려 있는 나는 혼자 여행할 때는 사람들이 몰리는 관광지에 굳이 가보는 취향은 아니다. 관광지는 보통 일행이 있을 때 함께 다니는 편이다. 그렇다보니 딱히 급할 게 없었다.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메뉴는 진즉에 스프카레로 결정했지만, 그럼에도 꽤 오랜 시간 검색을 했던 건 관광객들 보다는 현지인들을 많이 상대하는 식당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구시로와 오비히로에서 생존 일본어 눈치가 좀 생긴 마당에 삿포로의 현지 식당 정도는 전혀 문제될 게 없을 것 같았다.

 

아무튼 그렇게 즉흥적으로 동선을 결정했다. 숙소에서 도요히라 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삿포로 맥주 박물관이 나온다. 삿포로 클래식의 본고장까지 왔으니, 술을 맛으로 즐기는(????) 파충류로서 들러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음도 해본다면 좋겠지만 분명히 내 성격에 중간에 딴 길로 샐텐데, 그래서 라스트 오더 시간에 늦는 상황도 각오하고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숙소에서 대중교통을 타면 30분, 걸으면 40분이라는데 그럼 차라리 교통비를 더 맛있는 저녁 메뉴에 보태고 걸어가자는 생각이었다).

 

TMI) 삿포로 맥주 박물관의 관람은 18시까지이나, 시음을 하려면 16시 이전에 주문이 들어가야 한다.

 

맥주 박물관에 들르고 나서 오는 길에는 스프 카레와 라씨로 저녁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스아게라든지, 가라쿠라든지 4대 맛집이라는 스프카레 식당은 동선상 오픈런을 칠 수가 없어 무조건 웨이팅을 해야 할 것 같은데다, 뭐랄까, 약간 관광지의 맛일 것 같아서 살짝 꺼려지는 감이 있었다. 왜 한국 식당들도 좀 그런 데가 없잖아 있긴 하잖는가. 입맛에 덜 맞더라도 현지인들 비율이 관광객들보다 높아보이는 가게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는 다누키코지를 구경할 생각이었다. 삿포로에는 아케이드 상점가처럼 지붕이 덮힌 거리가 있는데, 돌아다니면서 구경이나 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삿포로 클래식과 가라아게군을 사서 방에서 가벼운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 삿포로 클래식을 마실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부지런히 맛을 기억해둬야 한다 (라는 주정뱅이의 핑계).

 

사족이지만, 딱히 삿포로 시내에 가보고 싶은 곳이 없었던 건 시계탑을 보고 실망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누가 알았을까.

이렇게 맑았던 날씨가 두 시간 뒤에는 완전히 달라질 거라는 걸.

 

 

숙소에서 삿포로 맥주 박물관까지는 도요히라 강을 쭉 따라가면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와, 일본에서 즐기는 강변 트래킹! 이 좋은 날씨를 즐기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도요히라 강변에 닿는 건 그리 멀지 않았다.

 

첫 날에 잠깐 봤던 강줄기부터, 삿포로에는 강줄기가 생각보다 많다. 도요히라 강은 그 중에서는 (내가 본 바로는) 가장 큰 놈이었다. 지도로 봤을 땐 한강보다 살짝 작은 크기로 보이는.

 

찬 공기와 따뜻한 햇볕의 조화. 자외선이 강할 것 같은 하늘이었지만 다행히 선크림은 챙겨왔기에 조금은 마음놓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탁 트인 눈밭
계단인 것 같은데. 썰매타기 좋겠다

 

와, 이렇게까지 눈이 안 녹았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요 며칠 눈밭을 그렇게나 많이 봤는데 볼 때마다 경이롭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당장 몇 걸음 앞에, 맘만 먹으면 밟아버릴 수 있는(????) 눈밭이 있다는 게 뭔가 시원했다. 아, 넓은 바다 볼 때의 느낌이라면 대충 비슷하려나.

 

강변 산책로를 따라 걸을 수는 없었지만, 이런 이유라면 양보할 수 있지.

 

 

도로 옆을 따라 나있는 작은 인도. 강바람 때문인지, 홋카이도에 와서는 처음으로 조금 발이 미끌리는 길이었다.

 

까악선생
길 한가운데서 화장실이 급한 것 같은 자세 하고 찍은 사진

 

삿포로의 분위기를 한 방에 잘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라고 생각했다.

건물이 크기를 보면 도시는 도시지만, 여유가 있는 도시다.

 

강변뷰 건물은 얼마일까
넓은 도화지에 드리운 그림자
이놈이 그린 것이었다
자전거 도로가 있었네, 하고 봤더니 누군가 타고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삿포로에서 취미 하려면 이정도 각오는 있어야 하나보다
강물이 얼었던 건 아니었나보다

 

뭔가 폭설내린 서울의 인구가 반의 반토막이 났다면 대충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낮은 기온때문에 마스크 안쪽에 자꾸 물이 차서 벗고 다니다가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을 마주쳐서 쓰려고 봤더니 뭔가 딱딱하게 걸리는 거 있지. 한 5분 들고 다녔다고 마스크 안쪽에 맺힌 물이 얼어버렸다.

 

TMI) 23년 2월 기준 일본의 마스크 착용은 권고 사항이었다. 내가 갔을 땐 쓴 사람 반, 안쓴 사람 반 정도였다. 안쓴게 다 외국인들 아니었냐구요? 몰라요 아무튼 반반이었음

 

강변을 빠져나와 도심으로 걸어가다보니,

 

아이-맥스

 

생각보다 삿포로 팩토리가 멀지 않았네? 생각하고 시계를 봤다. 아, 벌써 한 30분 걸었구나. 머네.

문득 우리 어머니 딸(20대, 미혼. 어떠한 경우에도 발보다 운전을 선호. 어릴 때부터 남동생 자라랑 대판 싸워서 안 친함)이 내가 이러고 있는 걸 봤으면 뭔 길에 시간을 그렇게 뿌리냐고 잔소리 폭격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이런 여유가 메인 컨텐츠인걸. 일상에서는 이렇게 못 걸어다니잖아.

 

삿포로 팩토리에는 혼자 들어가서 뭐 할 것도 없고 보고 싶은 것도 딱히 없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옆에 있던 ㄹㅇ팩토리. 순간 이게 박물관인가 살짝 어리버리했다
지도. 이 부지 안에는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나였다. 카메라는 아니고 핸드폰이긴 했지만.

 

살짝 돌아만 보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맥주 박물관에 뭔가 사람이 몰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서.

 

근처에 있던 건물 1. 이런 햇볕이 뭔가 아련한 걸 떠올리게 하는 느낌이었어
걸어볼 생각도 들지 않게 아주 야무지게 눈이 쌓였다
저기 저 애들 굴러다니고 있는거 재밌게 놀고있는 겁니다

 

애들은 눈이 차갑지도 않나.

하긴 생각해보면 2005년 시즌 자라도 맨손으로 눈으로 성벽쌓고 그 뒤에 은엄폐하면서 눈싸움 했었구나.

내 살면서 그때보다 더 피가 끓어본 적이 아직까진 없다.

 

아 아재요

 

TMI)

혹시 저렇게 노랗게 생긴 버튼이 신호등에 달려 있다면 누르자. 신호기도 약간 구형 신호기처럼 생긴 거다. 파파고로 저 버튼 밑에 적힌 안내를 번역하면 뭐 이상하게 번역이 될 수도 있는데, 그냥 한국에도 있는 반응형 신호기다. 한국과는 다른 게, 얘는 안누르면 영원히 빨간불이다.

 

어떻게 아냐고? 오비히로에서 당했다. 시골이라 여유롭네~ 하면서 5분동안 기다림ㅎ;

 

뭔가 일본에서 한 번 쯤 성공해보고 싶었던 전철 사진. 이번에도 실패 !

 

눈밭을 헤치고 강을 지나서 빌딩 숲을 뚫고 지하도까지 오르내리며 삿포로의 정기를 온몸으로 받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에버랜드 셔틀타는 곳인줄

 

웅장한 입구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단지가 크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건물은 식당 혹은 주점이였고, 박물관은 딱 건물 하나.

 

당연하게도 시음 라스트오더 시간은 넘겨있었다. 40분 거리를 한 시간 20분만에 도착하는 남자.

그래서 이 때까지만 해도 하늘이 흐려진 게 그냥 해가 져서 그러는 건 줄 알았다.

 

본인 미래도 모른 채.

숨은 그림 찾기 (제시어 : 고드름)
"삿포로 비어 가르텐"
가장 처음 보이는 건물. 메인 건물인 줄 알고 열심히 찍어 댔는데 나중에 보니 식당이어서 조금 민망해졌다
의외로 건물 자체는 규모가 좀 있는 편
"This building is the Restaurant" 이랜다

 

솔직히, 아직 내부에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그냥 건물 외관 자체만 봐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대포 카메라를 들고 오신 관광객 분들도 꽤 계셨고, 서로 다양한 스팟에서 사진을 찍어주는 분들도 많았다. 아, 이 땐 단체로 오신 분들이 좀 계셔서 한국어 반 중국어 반이긴 했다.

 

다른 각도에서 본, 위의 저 식당.
라일락이니 뭐니 하는 걸 보니 주점이 입점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박물관 입구

 

전남 담양에는 메타세쿼이어 가로수길이 있다. 예전에 1박2일 예능에도 소개가 되었고 실제로 근교에서 여름에 피서지로도 많이 이용했던 명소인데, 어느날 그 걷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길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차단기가 설치되고, 요금을 받더니, 근처에 메타 프로방스라는 테마 단지가 생겼다. 그 길이 유료화가 된 이후로는 근처에 지나갈 일이 있더라도 단 한번도 내려볼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개인적으로 그런 관광 산업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길을 그냥 잘 정비해서 열어 뒀으면 주변의 테마 단지도 좀 더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같은 담양도 관방제림 이런데도 걸어다니는 건 돈 안받잖아. 거긴 지금도 어쩌다 본가에 내려가면 한번씩 꼭 가서 핸드드립 한 잔씩 마시고 오는데.

 

갑자기 뭔 헛소리냐고요? 그러게요. 근데 그냥 저 나무 보니까 그 생각이 났던 걸. 아 고서가서 창평국밥 먹고싶다. 개인적으로 서울에서 향수병 걸리는 음식 1위

 

아무튼, 시음 시간은 끝났지만 그래도 박물관을 안들어가면 섭하지. 여행하면서 지금까지 마신 삿포로 클래식, 이제는 알고 마시자(?)

 

이용 시간 참고. 관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서 시작하면 된다
한국어 리플렛이 있긴 한데 안가져가도 된다. 안쪽에 더 자세한 한국어 설명 있음
들어가자마자 마주치는 거대한 발효통(이었던 것 같다 몰?루)
사실 이 유리창이 더 와닿았음
전시실. 이 한 층이 전부다
한국어, 중국어, 영어 번역을 제공한다. 읽고 옆에 다시 꽂아두는 형식

 

의외로 전시되어있는 삿포로 맥주의 역사는 흥미로웠다. 한국인이라 어쩔 수 없이 비판적인 자세로 읽게 되는 건 맞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천천히 읽어볼 만 했다. 홋카이도라는 곳의 지리적인 특성과 역사가 맞물리는 부분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아. 이 자라는 고등학교때 사탐을 생윤밖에 안해봤습니다. 그마저도 목차만 읽고 던진 수준이라 차라리 숙제 안하고 맞는 쪽을 택함(남고였고 그 당시엔 체벌이 당연히? 용인되던 시기). 사탐에 관해서 알고 있는 건 유명한 인강 강사님들 밈밖에 없어서 이런 걸 처음 느껴봤다고 하네요.

 

한쪽 벽에 전시된 삿포로 광고의 역사. 개인적으론 디자인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예전 병들이라고 하네요. 그 당시 가장 비싼 술 중 하나였다고 해서 그런가 뭔가 고급져보임

 

전시실 아래층은 역시나 기념품 샵이 국룰이다. 차분히 구경하고 싶었지만,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냥 퇴각.

 

아마 가장 인기있는 상품이라고 한다면 저 미니사이즈 삿포로 클래식 번들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어느새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아점을 좀 일찍 먹어서 그런지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보정 1도 안했는데 얻어걸린 색감.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내가 봐두었던 스프커리 집은 맥주박물관에서 오도리역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다.

걸어서 10분 정도, 지금 가면 적당히 오픈런을 칠 수 있을만한 시간이었다.

 

아, 그런데 슬슬 눈이 오기 시작했다. 날이 이렇게 갑자기 흐려진다고?

 

눈은 눈이고, 가다가 잡히는 사진 각은 못참지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이 동네 주민이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아, 밤에는 이거 무조건 펑펑 내릴 눈이다.

안경에 눈이 더 묻기 전에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10. 숨만 쉬어도 여행이 아니면 못 해볼 경험을 하게 해주네

 

 

응 어림도 없지. 어쩐지 이 주변을 세바퀴는 돌았는데 비슷한 인테리어가 안보이더라.

뭐 임대인지 그냥 이 날만 안 연건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구글 지도에 적힌 초록 빛의 '영업 중' 세 글자를 다시 보면서 약간 허탈했지만, 즉흥 여행인데 이정도 차질은 한 번쯤 있어야지. 지금껏 너무 평탄했잖아.

 

결국 플랜B

 

이미 오픈런은 늦었다.

이참에 다누키코지와 가까운 맛집으로 가보자 싶었다. 웨이팅은 어쩔 수 없겠지만.

여태 사람 많은 곳 잘 피해 다녔으니까, 한 번 정도는 보증된 맛집을 웨이팅해서 들어가는 것도 좋겠다. 삿포로니까.

 

해 질 녘 홋카이도청 앞.

 

점점 사진이 줄어드는 건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와서다. 사진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아니 두 시간 전 까지만 해도 눈은 무슨, 이대로 봄이 오겠다 싶은 날씨였는데.

 

대충 체감이 될런지. 뿌연 게 다 눈 때문이었다

 

출발하기 전 한국에서 본 일기예보로는 내가 여행을 온 6일 내내 삿포로에 눈이 내린다고 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여행 4일차의 지금이 처음으로 제대로 맞는 눈이었다. 눈으로 유명한 홋카이도에서 눈을 한 번도 못보고 돌아갔으면 좀 실망할 뻔 했잖아.

 

이전과는 다른, 삿포로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약간의 낭만이 충전되었다. 앞이 잘 안보여서 걷는 게 좀 힘들긴 했지만.

 

도착

 

낭만은 낭만이고.

안타깝게도 좀 늦게 도착한 나머지 눈을 맞으며 기다려야 했다. 패딩에 눈이 쌓이는 걸 보면서 그냥 포장해갈까도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아 아냐. 여기까지 온 게 있는데 아깝지.

 

메뉴판은 일본어, 영어 두 종류가 있었다. 직원분께서 어떤게 필요하냐고 물어보신다
저거 눈 좀 털고 본거다

 

홋카이도를 비롯해서 일본 전역에서 맛볼 수 있는 스프카레의 주문 방식은, 뭐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세 단계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메뉴 선택. 어 그러니까, 토핑을 선택하는 거다. 어떤 건더기가 들어간 카레를 먹을 것이냐.

두 번째, 국물 선택. 건더기를 골랐으니 국물 베이스를 선택하는 건데, 스아게 플러스의 경우에는 특별한 건 없이 그냥 기본인 '스아게 스프'를 가장 많이 고르는 것 같다.

마지막, 맵기와 (감이 잘 안오면 recommendation 국룰이다) 밥 양을 고르고, 추가로 올리고 싶은 건더기가 있으면 선택하면 된다.

그리고 빠지면 섭한 삿포로 클래식 나마비루. 나 좀 웃겼던게, 며칠간 저 '비어' 대신에 '비루' 가 입에 붙었던 나머지 주문하면서 내내 혓바닥 엄청 굴려가면서 영어로 얘기하다가 막판에 나도 모르게 'and 놔뫄비루 오네가이시마스' 가 튀어나왔다. 아니 이거 거기 있었으면 진짜 실소터질거임 웨이팅 줄 내 앞에 한국인 여성 두 분 일행 계셨는데 갑자기 대화 끊기고 몰래 웃참하시는거 다 봤습니다 글로 써서 노잼인거임 진짜임

 

뭔가 되게 삿포로스러운 사진
당연히 관람차도 안돌아가고 있음

 

스아게 플러스는 2층이었다. 건물 1층은 다른 이자카야였던 것 같은데, 단골 분들이 꽤나 있으신 느낌이었다. 눈을 하도 맞고 서있다 보니까 중간에 그냥 저기로 들어가버릴까도 아주 잠깐 생각했다.

 

1인석
술 중독;

 

30분 정도 기다렸나. 확실히 1인이라 순서가 왔을 때 입장이 빠르긴 했다.

먼저 나온 맥주로 목을 축이고 있으니 음식이 나왔다.

 

 

내가 주문한 레시피는 오이스터 어쩌고에 기본 국물, 맵기 3단계, 밥 중간.

전 날 부타동을 먹어서 고기보다는 해산물이 땡겼다. 뭔가 국물이 덜 기름질 것 같기도 하고.

 

스프카레는 뭔가, 굳이 카레라는 이름을 쓰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푸짐한 토핑도 토핑이지만, 국물만 따로 떠먹어도 짜지 않고 맛있었다. 약간의 산미가 느끼할 수 있는 재료들을 잘 잡아주는 느낌.

밥에 레몬을 뿌리고 카레와 같이 떠먹으면 밸런스가 적절히 맞았다. 호불호가 없을 것 같은 맛이었다.

일단 굴을 굉장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굴이 충분히 많이 들어가 있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저 브로콜리가 존맛.

 

어느 식당에 가느냐에 따라서 맛이 천차만별일 것 같은 음식이었다. 주인장의 내공이 돋보일 수 있는 메뉴일 것 같기도 하고.

이 스프카레라는 음식을 처음 먹어봐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스아게 플러스는 뭔가 대중적이도록 잘 정제된 레시피를 따라 맛을 낸 것 같았다. 맛이 없다거나 실망했다는 게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에서 스프카레를 먹게 된다면 이 맛을 기준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차별화' 보다는 '조화' 에 신경을 쓴 레시피일 것 같았다.

 

 

뭐가 어쨌든 그게 중요하랴. 입맛에 잘 맞는 맛있는 음식. 따뜻한 실내에서는 남 일처럼 느껴지는 눈보라. 술 기운.

 

...을 즐기기엔 기다리고 있던 대기줄이 너무 길었다. 적당히 후루룩 즐기고 다누키코지를 돌아다닐 요량으로 식당을 나왔다.

 

"돼지새끼"

어째 식당에 들어가기 전보다 눈이 더 오는 것 같았다.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래 사람 나온 부분은 다 짤랐지만, 인파로 꽉꽉 차있었다

 

다누키코지는 대충 이런 느낌으로 상가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이거 혼자 와서 할 게 없었다. 아니 굳이 목적지가 없다면 돌아다녀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

여기가 아니라도 오사카나 도쿄에서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빠칭코, 라멘집, 기념품샵, 뭔지 알죠.

 

사실 눈을 꽤 많이 맞아서 지친 것도 있었다. 그래서 그냥 따뜻하고 여유로운 호텔 방에서 삿포로 클래식 딱 한 캔만 더 마시기로 했다.

편의점에서 쓴 걸 다 합치면 7000엔은 될 것 같지만 아무튼 나만 좋으면 됐지.

 

으아아아아아ㅏㅏ아ㅏ아

 

이런 날씨에 밖에 나와있어 본 게 얼마만이야!

낭만이고 뭐고 그냥 땅만 보면서 일단 숙소로 도망갔던 것 같다.

 

무사히 도착한 숙소에서 한 숨 돌리고 가라아게군을 사기 위해 큰 맘먹고 나왔는데,

 

?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게 인생이지

숙소 들어간지 10분만에 좋아진 날씨란.

아무튼 편의점 편하게 다녀올 수 있으니 좋은 거지. 좀 녹았나 싶었던 도로에 다시 새로운 코팅이 생겼다.

 

나의 여행을 책임져줘서 고마워 !

 

다음 날엔 실질적으로 여행하는 마지막 날. 점심을 먹은 이후에, 당일치기로 오타루에 다녀올 예정이었다.

관광으로 유명한 오타루를 마지막에 둔 것은 뭔가 즉흥으로 떠나도 돌발 상황 없이 깔끔한 마무리가 될 것 같아서였다.

대충 오타루 역에서 미나미오타루역 근처를 찍고 다시 오타루역으로 올라올 계획이었다. 많이 걷겠지, 이 날도 꽤 걸은 데다가 눈까지 맞았기에 유일한 변수인 '건강'을 잘 지켜 여행의 마지막까지 만족스럽게 마무리짓기 위해, 저녁에 들러볼 오타루의 식당을 찾아본 후 일찍 잠에 들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