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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적 여행기

[230218~230223, 홋카이도 (3) ] 나쁘지 않았다면 좋은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너에게는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안아줄 수 밖에 없어

위수, <교토>

 

 

여행 3일차, 시간이 많이 남아버린 구시로. 할 것도 없고 여기까지 온 김에 태평양을 맨 눈으로 보고 가자는 즉흥 계획을 실천하는 자라.

 

 

7. 목적지를 향해 생각 없이 걷는 길이 항상 지루하지는 않더라

 

오후같은 빛이지만, 정오 즈음이다

 

누사마이 다리를 지나 도로를 쭉 따라가다 보면 바닷가에 닿을 수 있었다.

지도를 보니, 바다를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나같은 뚜벅이를 위한 곳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아무렴 어때.

홋카이도에 나중에 다시 오더라도 겨울의 '북태평양' 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왜인지 쉽게 들지 않았다.

 

그런데 시작부터 오르막길이었다. 폭설이 쏟아지던 아침과는 딴 판으로 날도 꽤 더웠던 터라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일본의 바닷가 도시답게 홍수나 쓰나미에 대한 대책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꽤나 경사가 가팔랐다. 여긴 열선이 깔려 있지 싶었다
일단 멈춤

 

숙소가 있던 동네나 역 앞의 거리와는 다르게 조용한 동네였다. 한국으로 치면 '군' 의 주거구역 같은 느낌.

 

사방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 때문인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그 잔잔함을 음미하며 걸었던 것 같다.

 

누군가 너까래로 한 번 쭉 민 것 같은 그런 느낌. 무거워도 기분 좋았겠다

 

가는 동안 마주친 행인이라고는 아마 운동하러 가는 것 같은 젊은 남성분 한 분 뿐이었다.

이곳의 시계는 서울과 다를 것 같은 느낌.

 

대충 한국인이 편안해지는 눈 사진
절대 과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도로

 

여기밖에 모르긴 하지만, 일본의 시골은 한국과 다르게 탁 트여 있는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이 때쯤 듣고 있었던 노래.

스장 만세

 

약간 보정하면 배경화면st 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윈도우 버전
수상할 정도로 우체통을 좋아하는 파충류

 

걸음을 시작한 지 30분 정도 되었나, 도로 끝으로 바다가 보였다.

 

이래봬도 오후 1시도 안 된 시간이다

 

도로변에 갑자기 나타난 바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바다가 이렇게 일상적인 공간에 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울 거다.

그런 공간에 묻어있는 바다는 전 날 봤던 막막하고 냉정한 바다가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인 바다였다.

 

다만 조금 더 이 광경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건, 저 멀리로 한참을 나아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바다의 경계선이 이 곳이라는 것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던 게, 이쪽의 사람의 흔적을 빼면 아무리 고개를 돌려봐도 저 쪽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저 절벽 느낌이 장난 아니었는데 담아지질 않는다

 

 

지도를 보면 저 아래쪽이 원래는 내려갈 수 있는 공원인 것 같았다.

바다를 조금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눈으로 인해 막혀 있었고, 제설차 한 대만이 느릿느릿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저 멀리의 물은 미동도 없어 보였지만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는 매서웠다.

부서진 물이 족히 1미터씩은 튀어 올랐다. 여기까지 오면서 봤던 쓰나미 대책들이 대번에 이해가 되는 장면이었다.

 

눈보다 더 반짝였던 물빛
실물 느낌과 그나마 가까운 사진
바닷가 옆의 인도와 차도

 

잠깐 서서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무슨 상념에 잠긴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까지 탁 트이고 정적인 풍경을 본 것이 얼마나 되었나 싶어서, 방파제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보기만 할 뿐이었다.

 

바다를 보는 걸 너무나 좋아하는 나라서, 여기까지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구시로를 뜨기 전까지 남는 시간에 이 물 쪼금 보자고 갑자기 몇 십분을 오르막과 내리막을 조심조심 걸으며 왔지. 이렇게 갑자기 시작한 시간때우기(?)들이 으레 그렇듯, 뭔가 기가 막힌 경험이나 새로운 일을 예상하지도 않았고, 생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충분히 좋았다. 누군가 '더 훌륭한 여행 경험', 그러니까 예를 들어 원래 계획이었던 습지의 설원을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타는 경험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줄테니 할거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당연히 싫다고 하겠다. 그냥 이렇게 쓰이고 있는 스토리가 좋았다. 더 단순하게는 눈 앞에 펼쳐진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이 좋았다. 

 

지금 한국에 돌아와서 되짚어보니, 이렇게 멀리까지 가서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다녀도 정말 만족할 수 있는 건 이제는 나름 내가 나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체감상 한참은 더 될 것 같은데 구시로 역까지 2키로밖에 안된다니

 

아침부터 눈밭을 많이 걸었더니 내일은 종아리에 분명 근육통이 올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일본에 와서 카페를 한 번도 안갔구나. 커피를 물처럼 마시는 한국인으로서 이 사태를 참을 수 없었다.

구시로 시내로 돌아가면 (지금까지 하나도 못 본 것 같긴 하지만) 카페가 하나쯤은 있겠지. 시내로 돌아가기로 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것도 좋지만, 그러려면 바다를 등지고 돌아서야 했다.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아서, 급할 일도 없으니 좀 돌아가더라도 바닷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거의 등산하는 수준. 낭만이 가득했다

 

이런 눈을 한국에서 언제 밟아 보겠냐.

 

그래도 사람이 사는 곳이면 길은 있었다

 

바다를 뒤로하니 네모 반듯한 주거 구역이 나타났다.

 

 

 

누군가 열심히 치워둔 눈이 무너져내린 모습.

쌓아 올린 것이 많을 수록 무너지기 쉬운 법이다.

어차피 다시 쌓아 올릴 거 아니면 그냥 방치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하고서 별로 개의치 말 것.

 

뭔 갑자기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꼰대가 튀어나왔지만 개인적으로는 군입대 이후로 크게 다가온 몇 번의 굴곡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마법의 주문이다.

 

뭐요. 그냥 그렇다고.

 

 

평범한 미용실일 뿐인 건물.

건물들의 이런 색깔이 뭔가 눈과 잘 어울리고 좋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예술, 가까이서 보면 시ㅂ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국적인 절이라고 함

 

지도로 본 길에는 이런 절같은 게 없었는데.

일단 있어보여서 사진부터 찍고 나서야 거의 5분 정도를 잘못 걸어온 걸 알았다.

부처님께서 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구나.

 

저번에도 쓴 것 같지만 난 무교다.

 

길가다 보인 신사. 외에도 학교나 법률사무소(?) 등 현지 인프라를 지나왔다
저 멀리 보이는 구시로 강.

 

도로에 깔린 열선 때문인지 그냥 날이 많이 개어서 그런건지 도로와 인도의 눈이 녹아 찰박거리기 시작했다.

눈보라때문에 눈도 뜨기 힘들었던 아침과 같은 날, 같은 동네가 맞나 싶을 정도.

 

이거 용도가 뭘까 한참 생각해봤다. 아마 이 앞이 바로 계단이라서, 자전거가 눈길에 미끄러졌을 때 그냥 들이박으라는 바리케이트 같은 것이 아닐까 추측.
어떻게하면 지하통로에 이렇게까지 눈이 쌓일 수가 있는거지

 

 

눈이 완전히 녹아버린 구시로 강. 아침에 들렀을 때와는 완전히 딴 풍경이 되어 있었다.

 

이제 곧 이동할 오비히로

 

이 날 구시로 시내에 문을 연 카페는 세 군데 정도 있었다.

하나는 구시로 역에, 하나는 대로변의 어떤 호텔 로비에 딸려 있는 것이었고, 마지막 하나는 뭔가 이국적인 다방같은 느낌이었다.

당연히 마지막 하나로 목적지를 정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프랑스 사칸(France sakan)이라고 적어놨네.

 

가서 보니 다방같은 느낌이 아니라 진짜 다방이었다
테이블과 1인석이 있었다
실제로 주인 여사님께서 사용하는 오븐과 주방. 바로 앞의 재떨이처럼 생긴 건 진짜로 재떨이다.
1인석.
블렌딩 커피. 원래는 아아를 마시고자 했지만, 가게에 들어가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음료를 주문하자 먼저 얼음물과 따뜻하게 데워진 물수건이 준비되었다. 따뜻한 조명 탓이었을까, 물수건으로 손을 톡톡 두드리자 몸이 쫙 풀리면서 노곤함이 확 쏟아졌다. 이 날만 해서 벌써 10키로는 족히 걸은 것 같은데 그럴 만도 했다.

 

내가 1인석에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 한 분께서 들어 오셨다. 아마 주인 여사님과 친한 단골인 것 같았다.

1인석에 자리를 잡은 뒤 음료와 빵을 주문하고, 재떨이를 가져와 담배(보다는 시가에 가까웠다. 두꺼운 그거)에 불을 붙이고, 신문을 꺼내 읽으며 한 모금 쭉 빨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주인 여사님과 가벼운 대화.

 

늘어진 테잎같은 장면이었다. 혹은 교양 영화 강의에서 잠깐씩 보는 무성 영화. 타는 시가의 냄새에서도 빛바랜 색이 묻어 나왔다.

 

커피 향을 오래오래 즐겼다. 아마 메뉴가 "부랜-도 코오히" 였던가 뭐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고 일단 따뜻한 커피처럼 생겨서 주문했었던 것 같다. 한 모금 마셔보고서야 아마도 블렌딩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흘러나오는 음악도 없이, 저 안쪽 보이지 않는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와 웃음(물론 일본어라 한 마디도 알아듣지는 못했다), 시가의 향, 노곤한 조명과 신문 넘기는 소리, 지브리 영화에서 녹음해 온 듯한 나이 지긋하신 여사님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속에 나도 잠시 늘어져 있기로 했다.

 

구시로를 걸어다니면서 엿본 그들의 여유 속에 드디어 발 하나 정도 집어 넣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건 그냥, 그때 마시던 커피의 향기였던 것 같다.

 

적당히 기차 시간에 맞춰 카페를 나와 구시로 역으로 향했다.

 

역에 왜 이런게 있는지 모르겠다
대합실에서 본 승차홈.

 

락커에 맡겨두었던 짐을 꺼냈다.

다음 목적지는 오비히로. 전날 구시로에 오면서 슬쩍 내려다봤던 장면은, 여기보다 더 시골이었다.

아마 오비히로에 도착하면 해가 져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OZORA 열차에 올랐다.

 

일본의 기차역은 사진을 잘 배우고 오면 되게 재밌을 것 같다
삿포로에서 승객들을 싣고 온 열차는 간단한 청소 후에 다시 삿포로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지정석, 맨 앞자리.

기차가 출발할 때는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홋카이도의 바닷가에는 이른 저녁이 찾아오고 있었다.

기차에서 보이는 태평양 위로 해가 지기 시작했다.

 

 

시선에 닿는 선은 두 가지의 직선밖에 없었다.

흰 땅과 회색의 물을 나누는 달리는 직선, 그리고 무채색과 감각적인 채색을 나누는 멈춰있는 선.

 

날이 개어 하늘이 온전히 제 색을 뽐내는 날의 태평양은, 온통 희었던 전날과는 또 다른 장소를 여행하는 것 같았다.

 

 

중간 정차역이었던 이케다 역.

 

눈부심을 감수할만한 찰나의 절경이 지나고 기차 밖에는 흰 눈 위에 검은 하늘이 깔렸다.

그 밤 사이를 두 시간여를 달려, 기차는 오비히로에 도착했다.

 

 

8. 결과가 만족스러우면 과정은 미화되는 것

 

오비히로 역
시커멓다

 

오비히로에 도착했을 땐 이미 엄청나게 깜깜해진 뒤였다.

어차피 이날의 일정은 저녁먹기로 끝낼 생각이었다. 숙소의 위치가 오비히로 역 바로 뒤쪽이라 체크인을 먼저 할까 했지만, 동네를 보아하니 괜히 식당 문을 일찍 닫아버릴까봐 그냥 가방을 들고 다녀오기로 했다. 캐리어도 아니니까 뭐.

 

역사 안쪽. 한산하긴 했지만 꽤 컸다.

 

6시도 안됐다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어둠이었다.

30분 뒤 이 근방에서 여기가 가장 밝은 곳이라는 걸 알게 된건 넌센스.

 

역 앞 전경. 큼직큼직한 도로와 큰 건물 때문에 예상과는 다르게 큰 도시인 줄 알았다.
순간 "나가이시키야" 로 읽음

 

저녁으로 선택한 메뉴는 '부타동(돼지고기 덮밥)' .

낙농업이 발달한 홋카이도, 그 중에서 돼지고기로 유명한 오비히로였다. 오비히로 지방의 특색이 묻어있는 부타동은 이 지역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

구시로에서 삿포로까지 돌아가는 중간에 굳이 여기에 하루 숙소를 잡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보통 오비히로식 부타동의 원조라고 불리는 식당은 오비히로 역 근처의 '판초' 라는 식당인데, 이 날은 아쉽게도 문을 닫았다고.

그래서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진 다른 식당을 목적지로 삼았다.

오비히로라는 도시도 알아볼 겸, 가방을  짊어지고서 걸어서 출발.

 

역에서 3분정도 걸어갔나. 거리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내가 가기로 한 부타동 집은 보통 차를 렌트해서 가는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완전군장 산악행군까지 해낸 대한민국 육군 예비군에게 이정도는 별거 아니다.

...아마도.

 

가로등이 확 줄어 많이 어둡다, 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고담 시티"

 

빛도 잘 없는 이 도시를 걸으면서 느꼈던 뭔지 모를 감상이 단번에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며칠 뒤에 알 것 같은 느낌. 왜, 한국도 시골의 하루는 일찍 끝나잖는가.

실제로는 아마 클럽 건물이었던 것 같다.

 

물론 일본은 치안이 좋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거리에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단 한 명도 없었다.

 

목적지로 가려면 이 공원을 가로질러야 했다. 그러나...
길이 없으면 돌아가야지 뭐

 

아무래도 아침에 왔던 눈은 홋카이도 동부 전역에 내렸나보다.

누가 밟지도 않은 눈이 바닥에 뭉게뭉게 덮여 있었다.

길이 중간에 뚝 끊겨 있는 걸 보니 누군가 치우다 포기한 것 같았다.

 

다른 공원의 상태도 비슷했다. 바닥이 뭘로 돼있었는지도 알 수 없음
와중에도 문을 연 뭔가 느낌있는 가게.
DT가 있는 모스버거

 

뭔가 오비히로의 느낌은 공동 주택이 있는 미국같은 느낌이었다.

띄엄띄엄 있는 집과 중간중간 휴게소처럼 있는 가게들, 넓은 도로와 거의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 낮은 건물들.

뭐랄까, 뭔가 계획적으로 잘 구획이 나누어 진 시골 도시같은 느낌이었다.

 

전용 주차장

 

그렇게 30분 정도를 어둠 속에서 걷다 보니 목적지인 "부타이치 본점" 에 도착했다.

한 블럭 전에서 봐도 못 알아볼 수가 없는 큼직하고 번쩍번쩍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여긴 땅 값이 좀 싸려나.

 

 

부타이치에서는 입구에 마련된 키오스크에서 먼저 결제를 하고, 나오는 교환권을 점원 분께 드리면 주문이 들어가는 시스템이다.

한국어 등 외국어 옵션은 따로 없었지만 보통 여기까지 와서 부타동을 먹을 정도면 비쥬얼을 모를리가 없으니, 주문이 어렵지는 않았다.

 

6시 반 정도인데 테이블이 텅 비어있었다
안내받은 1인석
1인석 기본 상 세팅

 

먼저 얼음물과 쯔유가 나오는데, 한국인 입맛에는 기본 간이 짭짤한 편이라 쯔유를 더 쓸 필요는 없었다.

우선 냉수 한 잔 쭉 들이키니 몸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메뉴판. 나는 3번 믹스동을 주문했다.

엄청난 양의 걷기로 점심에 먹은 스파카츠의 탄수화물이 이미 다 소화되었기 때문에 곱배기를 먹을까 했지만, 빙결과 삿포로 클래식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고로 기본 사이즈로 결정했다.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오비히로식 부타동은 고기가 그릇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많이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기를 먼저 한 점 들었다. 한 점을 한 입에 다 넣기에는 조각이 조금 컸다.

소스는 약간, 내 고향이 전라도라 가까운 음식이 이것밖에 안 떠오르기는 하는데, 그 담양에 가면 숯불갈비 집들이 쭉 늘어서 있는 곳이 있다. 거기서 먹는 야들야들한 맛의 숯불갈비의 향에다가 간이 좀 더 쎈 맛이었다.

고기 아래의 밥에도 기본적인 간이 되어 있었던 건지 아니면 고기 기름과 소스가 흘러 스며 들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밥을 그냥 떠 먹었을 때도 오묘한 풍미가 느껴져 맛있었다.

 

아, 고기는 곱배기 시켰으면 조금 물릴 수 있는 맛이다. 쯔유니까.

그리고 기본이어도 상당히 양이 많다. 내가 양이 준 건지, 이번 여행은 돌아다니면서 일본에서 소식한다는 느낌이 한 번도 없었다.

 

조금 느끼해 질 때마다 호로록 마시면 좋았던 미소국

 

식사를 마칠 때 즈음 따뜻한 차가 준비된다.

홋카이도가 또 말차가 유명하지 않은가. 녹차류인 것 같은데, 뜨끈하게 몸이 풀어지면서 입에 남아 있던 기름 향도 씻어내주어 훌륭한 마무리였다.

 

식사를 마치고 체크인을 하러 숙소로 향했다.

오비히로 역까지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도 됐지만, 좁은 길을 가로질러 왔으니 갈 때는 큰 길을 따라 오비히로의 분위기를 즐겨보기로 했다.

 

음...
여행일 기준 기름값이 서울보다 한참은 더 싼 느낌
방금 먹은 부타동도 이런데서 떼 왔으려나. "유한회사 오일시" 라고 적혀 있었다
건물의 수가 적어서 그렇지, 건물이 있으면 꽤 큰 규모들이긴 했다

 

앞으로 일본의 시골을 여행할 때도 적당한 시골을 찾아 가야겠다.

오비히로에서도 이쪽 부근만 이럴 수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감성으로 보기에도 도로 / 눈 / 차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었다.

오비히로가 맛을 찾아 오는 여행자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지만, 그래도 오래 머무를만한 곳이라고 하기엔 쉽지 않았다.

 

역에 가까워지면서 다시 건물의 크기와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본 "고담 시티'

 

이때 내 착장이 검은 볼캡에 츄리닝 바지에 롱패딩에다가 면도도 안한 상태였나 그랬던 것 같은데.

맞은 편에서 젊은 현지인 여성 한분이 내 쪽으로 걸어 오시다가 나를 슬쩍 보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저 소복히 쌓인 눈밭을 헤쳐 나가기 시작하셨다.

아 제설이 이렇게 되는 거구나. 좀 멀끔하게 다닐 걸 괜히 죄송합니다. 저라도 도망갈만한 비주얼이긴 했어요.

 

역 앞 광장(???)

 

오비히로역 바로 앞에는 오비히로 시청이 있었다.

물론,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

 

 

짜잔. 방금까지 보신 사진이 모두 7시 전후였다는 게 믿겨지십니까.

실제로는 카메라로 보이는 것 보다 훨씬 어두웠다.

 

오늘의 집

 

제발 오늘은 영어로 체크인이 잘 되길.

다행히도, 역 바로 앞의 호텔이라 그런지 영어를 잘 하시는 전담 직원분께서 따로 계셨다.

 

이게 4만원대 호텔...?

 

방은 여태 묵었던 방 중 제일 컸다. 역시 정말로 땅 값이 많이 싼 건가.

 

그리고 맥주를 조금 사오기 위해 편의점에 가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영화관
홍대에나 있을 법한 대형 이자카야. 이 동네 관광객은 몽땅 끌어모은 것 같았다

 

오비히로의 놀거리는 저 쪽이 아니라 이쪽에 있었다(...)

이래서 선입견과 확증편향을 조심해야 하는 거다. 개인적으로는 구시로보다 더 번쩍번쩍한 느낌이었다.

 

물론 삿포로와는 전혀 다른 시골이라는 전제 하에서.

 

방에서 내려다 본 오비히로 역. 택시 승강장과 버스 승강장이 보인다
빙결과 가라아게군 레드. 삿포로 클래식이 있어도 이 조합은 포기 못한다

 

아무튼, 더이상 밖에 있고 싶지 않았기에 방에 들어와 하루를 마무리했다. 모처럼 넓은 방인데 뽕을 뽑아야지.

다음 날에는 삿포로에서의 일정이 예정되어 있고, 역시 첫날에 가보지 않은 곳을 좀 걸어볼 예정이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