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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적 여행기

[230218~230223, 홋카이도 (2) ] 몰라도 괜찮다, 모자라도 괜찮다

추억은 한 편의 산문집 되어
길 잃은 맘을 위로하는 노래가 되고
그건 긴 어둠을 서성이던 청춘이
남기고 간 의미일 거야

신지훈, <추억은 한 편의 산문집 되어>

 

 

삿포로에서 하루를 머무르고, 가장 기대했던 SL 겨울의 습원호도 못타게 된 데다가 일본어도 못하는 주제에 무작정 구시로로 떠나는 자라.

 

 

4. 구시로 가는 길 : 홋카이도를 말하기에 삿포로는 너무 좁다

 

홋카이토 특급 열차 OZORA는 적당히 새마을호 정도의 느낌이라면 맞지 않을까 싶다. 기점인 삿포로부터 종점인 구시로까지 꽤 많은 역에서 정차하는데, 한국의 완행 열차들과는 다르게 역과 역 사이에 사람의 흔적은 많지 않고 대신 기가막힌 자연 풍경들을 즐길 수 있다.

열차에 눈이 엄청나게 튀어 창문이 더럽기에 사진은 잘 나오지 않지만, '관광'이나 '액티비티' 보다 잔잔한 여행을 선호하는 취향이라면 열차에 탑승하는 것 자체를 충분히 메인 컨텐츠로 삼을 만하다. 설국열차 그 자체.

 

출발 후로 30분 정도 지나 미나미치토세 역이었나, 아무튼 그 근처를 지나고 나니 본격적인 홋카이도의 설원이 펼쳐졌다.

 

눈이 튄 창문의 얼룩은 차마 지울 수 없었지만, 눈으로 보기에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하얀 색이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지금 이 기차 선로와 그 주변의 전선 뿐.

꽤나 발달된 도시로 보였던 삿포로의 모습에선 납득하기 어려웠던, 홋카이도의 굉장히 적은 인구수를 납득할 수 있었다.

 

빠르게 이동하는 열차의 엔진 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멀리서 느리게 움직일 뿐인 설원의 풍경에 현실감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 TMI) 이 날은 날이 꽤 흐린 편이라 체감이 잘 안되겠지만, 겨울에 홋카이도를 여행할 계획이라면, 그리고 특히 삿포로와 오타루 지역을 벗어날 예정이라면 선글라스와 선블록을 꼭 꼭 꼭 챙기도록 하자. 여행기 몇 편 뒤에 아마 적게 될 텐데, 난 그런 준비를 안해가서 약간 고생을 했다.

 

동양화는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쪽 도로와 저쪽 나무 숲 사이의 눈 쌓인 곳은 강이다. 얼음이 얼고, 그 위에 눈이 쌓인 것.

 

중간 정차역이었던 토마무 역.

 

 

 

 

이 다음 날 하루 지낼 오비히로.

 

 

 

 

 

그 겨울왕국에 트롤들 웅크려있는 그 장면같았다

 

 

홋카이도는 자작나무가 굉장히 많았다.

쭉 뻗은 평지에 이쑤시개들마냥 꽂혀 있는 자작나무들,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 침엽수들.

홋카이도의 땅은 자칫 공허해 보이기도 하는 하얀 도화지 위에 매 순간 저마다의 스케치로 같은 듯 다른 작품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 때쯤 듣고 있던 노래.

그렇게 한 세 시간쯤 갔나.

창밖으로 갑자기 바다가 나타났다.

 

※ TMI) 삿포로에서 구시로까지 갈 계획이 있다면, 열차의 오른쪽 지정석을 구매하도록 하자. 왼쪽은 바다가 안보인다.

 

 

북태평양의 감상은, ...

 

그저 '막막하다' .

나무라도 박혀 있었던 넓은 설원과는 또 다르게,

고요하고, 차가운,

섬도 하나 떠 있지 않는 완전한 평면.

그 크기와 속을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냉정한 바다였다.

 

여담으로, 어떻게든 그런 느낌을 담아 보고자 수십 번 셔터를 누른 것 같은데, 내 능력으로는 달리는 열차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모두 지워버렸다.

 

구시로 전 역인 시라누카 역

 

이런 비경들이 당연하다는 듯 열차는 계속 달려나갔다.

 

옆자리 외국인 커플과의 4시간이 넘는 불편한(?) 동행 끝에 구시로 역에 도착했다.

타고 온 열차는 바로 삿포로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 구시로역의 하차장은 꽤나 북적스러웠다.

 

 

5. 특별할 일 없는 구시로의 하룻 밤

 

구시로역 내부에는 카페와 식당이 들어서 있었다.

 

구시로역 전경

 

구시로.

홋카이도 동부 최대의 도시지만, 인구는 17만밖에 되지 않는 해안 도시.

넓게 뻗은 구시로 습원은 세계에서 유명한 수준이며, 시내에서 이동하려면 차를 타고 가거나 1월과 2월에 운행하는 SL 겨울의 습원호 열차를 타야 하는데 내가 그걸 못타게 되었다, 이 말이다.

 

솔직히, 여기까지 오면서 평생 볼 설원을 다 봐서 그런지 딱히 그거 안타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구시로역 밖으로 나오자 바다의 짠내가 확 밀려 들어왔다.

왜, 그 동남아 여행 가면 비행기 내리자마자 확 느껴지는 습한 냄새 있잖은가. 그것의 짠내 버전 비슷한 느낌이었다.

 

 

숙소까지 조금 걷다보니 확실히 해안가라 그런지 삿포로보다 바람이 조금 더 셌다.

 

 

문 닫은 헬스장.

 

 

아니 내가 사람을 피해 다닌 게 아니라 진짜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바다 도시라 그런지, 공기가 삿포로보다 조금 더 찬 느낌이었다.

 

구시로에서 가장 큰 사거리. 구시로 습원의 모습을 사진으로라도 볼 수 있었다

 

정말 조용한 동네다.

큰 건물이 없진 않았지만, 확실히 관광지의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걷다 보니 숙소에 도착했다. 

 

오늘의 집
숙소 바로 맞은 편의 구시로 강.

 

숙소 앞쪽 거리는 작은 꼬치집들이 즐비했다.

하루를 마친 바다 사람들이 모여 술 한잔과 맛있는 음식에 주인장과 함께 회포를 푸는 그런 작은 가게들의 느낌.

주인장이 문을 열고 싶을 때만 여는, 그런 느낌이었다.

한국어 안내판이 있는 곳은 야끼니꾸집 하나였다. 물론, 이번 여행에 고기는 계획이 없다.

 

그리고 일본 시골의 호텔은 3성급 온천 호텔이라고 해도 체크인을 할 때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았다. 발음의 격차가 더욱 커진 느낌.

혹시나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기본적인 것 외의 질문은 파파고를 돌려서 보여드리자. 피차 그 쪽이 훨씬 편할 것이다.

 

아, 3성급 온천 호텔이지만 내가 묵은 방은 4만원대의 작은 방이었다.

 

오?

 

호텔에서 보이는 구시로 리버 뷰.

 

아니 가격은 비슷하면서 크기가 삿포로 방의 거의 1.5배인데?

일단 생각보다 방이 너무 좋아서 살짝 놀랐다. 게다가 저 침대 머리맡의 조명이 분위기가 좋아 꽤나 맘에 들었다.

그리고 이 때쯤 저녁을 먹고 오면 온천이나 조금 즐겨볼까,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갑자기 방 안에서 음악 소리, 아니 정확히는 벨소리같은 게 들려왔다.

처음엔 전화 벨소리인 줄 알았다.

내가 로비에 뭘 두고왔나? 여권 있는데? 아니 일단 받아봐야겠다.

수화기를 들고 ㅁ..모시모시... 를 수줍게 내뱉어 봤지만, 민망하게도 수화기에선 뚜뚜 소리만 들려왔다. 전화 벨소리가 아니었던 거다.

아하, 문 벨소리였구나!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그러나 문을 열고 보인 건,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서 나처럼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던 옆옆옆방 외국인 분의 얼굴 뿐이었다.

방 안에서 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아니 그럼 이건 뭐여? 내가 뭘 건드렸나?

 

1분여 뒤에 소리가 그치고 나서야 그게 17시를 알리는 종소리였다는 걸 알게 됐다.

홋카이도에서는 11시와 17시, 두 번 길거리의 스피커에서 종소리가 나온다.

보통 식당들의 점심과 저녁 영업이 이 때 시작하기 때문에 거리의 분위기가 확 바뀌는 신호탄같은 소리인데, 이걸 호텔에서 방 안에 틀어줬던 것이었다(...) .

 

소리가 그친 뒤 멍한 공기로 가득찬 방 안에 허무하게 서 있긴 했지만, 한 편으로는 급하게 대화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에 크게 안도했다.

 

아무튼 그렇단 말이지, 밥을 먹으러 가볼까.

주변에 널린 게 식당인데, 아무데나 한 번 들어가 보자. 오랫동안 기차를 타느라 노곤해진 기분에 맥주 한 잔 하면 더 좋고.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벌써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구시로.

 

대체로 식당들이 모여 있는 거리는 이런 분위기였다.

 

짭짤한 냄새와 조용한 밤거리, 가게들의 반이 문을 열지 않았지만 나머지 반 정도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아니면 바에서 맥주 한 잔과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검은 장막을 뒤덮은 구시로의 시간은 그동안 내가 지내온 시간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인 듯 했다.

 

그러나 그런 여유를 즐기기엔 난 좀 오묘한 기분이었다.

정작 식사를 하러 가려고 생각해보니, 호텔 체크인을 할 때부터 경험했던 언어라는 큰 난관이 떠오른 것이다.

게다가, 히라가나는 드문드문 기억이 난다 쳐도, 가타가나는 저언혀 모르는 내가 과연 무사히 저녁식사를 마칠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되었다. 아무래도 이 도시의 여유에 슬쩍 끼어들기엔 난 언어부터 통하지 않는 이방인이니 말이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그나마 조금 여유로워 보였던 식당의 간판 한 쪽에 작은 욱일기 모양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 물론 지역 특성 상, 정치적인 의도가 들어 있다기 보다는 바다 위로 힘차게 떠오르는 해를 그린 것 같기는 하다.

그치만 난 한국인이잖아. 못 봤으면 몰라, 봐버렸는데 선뜻 들어갈수가 없었다.

 

일본은 이렇게 바깥에 메뉴판을 세워 둔 게 좋다

 

무작정 바에 들어가서 꼬치류에 맥주나 할까 싶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자라는 그럴 깜냥까지는 없었기에, 적당히 밖에 메뉴를 걸어둔 식당 중에서 괜찮은 메뉴를 찾아 들어가는 걸로 결정했다. 굶을 수는 없으니까. 바다 도시에서 먹는 카이센동(회덮밥)은 또 나름 좋겠지.

게다가, 작은 건물이라도 아무튼 한 층을 다 쓰는 규모라면 이 동네 베스트까진 아니라도 스테디셀러는 되지 않겠나.

 

이 간판을 삿포로 스스키노역 근처에서 다시 보고 프랜차이즈 였다는 걸 알게 된 건 며칠 뒤의 일이었다.

 

저 흰 색의 명패? 같은 게 신발장의 열쇠다. 자석 같은 걸로 작동하는 것 같은데, 저걸 뽑기만 하면 신발장이 잠긴다.

 

두 분 정도 함께 조용한 대화를 즐기시는 손님 한 테이블, 그리고 혼자 맥주에 요리를 즐기시는 손님 한 테이블 정도 더 있었다. 조용하고, 편안했다.

 

1층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계단만 덩그러니 있고, 2층으로 올라가면 식당이 나오는 구조였다.

올라가기 전, 파파고에 "외국인 혼자인데 괜찮을까요? 메뉴판 번역기는 있습니다." 를 적고서,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올라가자 점원분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1층 문이 열리면 2층에서 알아볼 수 있는 시스템으로 보였다.

 

아무튼 번역기를 돌리느라 퍼뜩 올라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려주신 점원 분께 "아노, 스미마셍..." 과 불쌍한 표정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과를 드린 뒤, 자리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기본적인 상차림. 조개 구이 등의 메뉴도 있었기에 테이블마다 화로가 준비되어 있었다.

 

솔직히 한국어 번역 상태는 구글 번역기 수준이었지만, 영어와 함께 보니 나쁘지 않았다.

 

자리로 안내받은 뒤 예상보다 엄청나게 다양한 메뉴 가짓수에 당황하는 나를 앞두고, 생글생글 웃으며 주문을 기다리고 계시는 점원분을 앞에 두고 있자니, 내 속이 괜히 더 타들어가며 1초가 1분처럼 느껴졌다. 아오 나 샛기 일본어 시간에 적당히 좀 잘 걸.

파파고를 켜고, "조금 이따가 결정 되면 다시 불러도 될까요?" 를 적었다. 또 다시 "아노, 스미마셍..." 과 불쌍한 표정을 짓자, 점원분께서는 흔쾌히 손짓 발짓으로 대충 뭐 저기 벨을 눌러달라 말씀해주시고(아마도 그런 뜻이었던 것 같다) 사라지셨다.

 

겨우 조금 한숨을 돌리게 되자, 왠지 모르게 좀 재밌는 기분이 들었다.

 

발이 따뜻했다

 

어차피 메뉴는 카이센동과 나마비루 (생맥주. 일본 식당 필수 레퍼토리로 꼭 알아가야 할 회화로 "나마비루 구다사이"가 있다) 로 결정하고 들어왔지만, 차분히 몇 페이지에 빼곡히 적혀 있던 다른 메뉴들도 살펴봤다.

해산물이 맛있는 일본, 그리고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한 홋카이도답게 다양한 해산물 요리가 가득했다. 맘같아선 이것저것 다 먹어보고 싶었지만 적당히 한국에서 쉽게 접하기 힘들 것 같은 음식 한 두가지 정도만 더 곁들여 주문하기로 했다.

 

아쉽게도 삿포로 클래식은 아니었지만 분위기를 받아서 그런가,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식전주로 첫 잔을 단숨에 쭉 들이키고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요리가 모두 준비되었다.

해물 5종 카이센동(메뉴에는 3종, 5종, 7종과 특 카이센동이 있었다) 과 '초절임 고등어를 살짝 구운 회', '차가운 첨가한 살짝 구운 매콤 명란(뭘 첨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메뉴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를 주문했다.

 

기본 찬으로 나온 우엉 당근 무침(인 것 같은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 미리 공부좀 하고 올걸)은 참기름 향이 솔솔 났는데 정말 맛있었다. 저것만 갖고 맥주를 마셔도 술술 잘 넘어갈 것 같은 느낌.

명란은, 왜 명란이 일본인들의 소울 푸드인지 납득이 되는 맛이었다. 조금 쎄게 느껴질 수 있는 간은 옆에 같이 나온 간 무와 함께 먹으니 궁합이 딱 맞았다.

고등어 요리로는 구운 고등어의 담백함을 회의 식감과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 먹을 수 있는 신선한 고등어 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고, 반찬 깡패답게 입맛을 훌륭히 돋워 주었다. 생 와사비를 살짝 올려 함께 먹으니 맥주잔에 절로 손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카이센동. 도시에서 신선한 회를 주문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약간의 생선 특유의 향이 있을 텐데, 이 바다생물들에서는 어떻게든 비린 맛을 조금이라도 찾아내 보려고 해도 전혀 그런 낌새조차 찾을 수 없었다. 흔히 '바다 향'이라고 표현하는 그것이 덜하고, 대신 무언가 겨울 바람을 머금은 식감이었다. 고기 자체의 담백함은 덤.

 

하지만 그들 중 가장 놀랐던 것이라고 한다면,

 

연어 알이 정말 맛있다!

 

바로 이 연어 알이었다.

일본의 편의점에서 먹을 수 있는 개애애ㅐㅐㅐㅐ 짜기만 한 연어알 삼각김밥 속 연어알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뭐랄까, 톡톡 터지는 식감이라기보다, 툭 건드리는 순간 정말 녹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전혀 비리거나 짜지 않았고, 오히려 담백한 쪽에 가까웠다. 다른 것 다 빼고 이것만 있어도 밥 한 그릇을 다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산물을 정말 좋아하는 나라서 기대치가 굉장히 높았지만 그것을 훨씬 웃도는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조용한 도시, 조용한 식당에서 고된 여정 끝에 맛 본 좋은 식사와, 맛있는 술.

이 저녁 한 번으로 구시로에 대한 인상이 전혀 달라질 정도였다.

 

오래도록 여유를 즐기며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이 사람들에게 나 같은 외지인은 어떻게 보일까.

보통 여기까지 온 외국인이라면 함께하는 일행이 있거나, 어느정도 일본에 익숙해 혼자 다녀도 무리가 없을만한 사람들이었지 않았을까.

그런데 나는 둘 다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돌이켜 봤을 때 떠올랐던 건, 지난 이틀간 나를 도와준 여러 시설의 직원분들, 횡단보도를 기다리며 멍때리고 허공을 응시했을 때 그 시선 끝에 서 계시다가 괜시리 웃으며 인사를 건네준 건너편의 행인들, 혹여 자신들의 작업이 가방 하나 들고 다니는 여행객에게 방해가 될까 저 멀리서부터 제설 장비를 들고 멈춰서 길을 비켜주시던 공무원 분들, 그리고 분명히 그리 달가운 손님은 아닐 텐데도 할 수 있는 모든 친절을 보여준 이 식당의 직원분까지.

 

음, 나는 어땠었지. 가장 최근이라면, 어쩌다 혼자 해방촌 근처를 걷고 있을 때 남산타워 올라가는 길을 묻던, 혼자 오셨던 여성 외국인 분을 상대할 때 어땠더라. 그보다 더 전이라면 영어 자막도 나오지 않는 웃는 남자 공연을 보러 3층 구석 자리를 찾아오신, 한국어가 안 되시는 외국인 관람객 분을 응대할 때 어땠더라. 그들이 모르고 틀렸다고 내가 화가 났던가. 답답한 게 있었다면, 더 잘 도와줄 능력이 안되는 나에게 답답해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게 아마 비단 여행의 일 만은 아닐 것이다. 어찌됐건, 나는 무언가에 항상 서투를 수 밖에 없을 텐데.

그럼 최대한 적극적으로 '나는 당신과 대화하고 싶다' 라는 자세를 어필하는 게 좋겠지. 속으로 문제를 끙끙 앓고 있다 한들 누군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모르고 서투르다면, 그런 상태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노력을 하는 게 응당 당연한 것일 테다. 그 당연한 것이 나에게는 너무도 어려웠지만, 이제라도 그 정도의 자세는 취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파파고에 "계산 부탁드려요" 를 먼저 적어 봤다. 오칸죠 오네가이시마스. 발음을 몇 번 굴려본 뒤에, 파파고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마치고 신발을 신은 뒤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아까의 직원분께서 가만히 서서 나를 배웅해주셨다.

술기운이 조금 올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직원 분의 미소에서 무언가 다른 걸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 잘 모르고 서투른 것 당연하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괜시리 혼자 겁먹고 낙담하지 않아도 된다고.

 

당연히 직원분께서 그렇게 말하고 싶으셨던 건 절대 아닐테지만 아무렴 어때.

그냥 그렇게, 이번 한 번만 보고 싶은 대로 보기로 했다.

 

안그래도 조용한 밤거리가 더 조용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문을 연 가게라고는 이제 정말 술집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거리는 탁 트이고 밝아서, 딱히 외지거나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 그냥 이건 술기운 때문이었나.

 

술집에서 슬램덩크 영화의 OST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넘버원 가드, 뚫어 !

 

생선 대가리가 파묻혔는데요 선생님

 

조용한 이 도시가 좋았다.

그렇게 늦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그치만 딱히 할게 없었기에, 조금 돌아다니며 밤공기를 즐기다가 숙소에 돌아가서 기행문을 쓰기 시작했다. 온천을 하자기엔 맥주를 마셔버렸으니.

 

아, 지금 이 글 부터는 여행이 완전히 끝난 뒤에 한국에서 작성하고 있다.

매일 저녁 방에 가서 글을 쓰기엔 삿포로 클래식이 너무 맘에 들었다.

 

 

6. 열차는 못 탔지만, 나는 눈밭을 실컷 봤지.

 

오하ㅡ욧

 

또 7시에 눈이 떠졌다.

 

다음 목적지인 오비히로로 가는 기차는 오후 4시 정도에 있다.

원래 관광열차를 이 날 탈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하루가 별 일정 없이 붕 떠버렸지만 일단 나갈 준비를 했다.

 

모닝 코오히 한 잔

 

 

음 상쾌한 아침~ 을 외치며 암막 커튼을 촥 걷었는데,

 

뭐여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밤부터 폭설이 시작되었나보다.

 

홋카이도에서 처음 맞는 눈이었지만, 이렇게 많이 오는 건 좀 그런데.

그치만 여기를 살면서 또 언제 와보겠나. 가방에서 우산을 빼서 들고 나갈까 했지만, 그냥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기로 했다.

 

어제는 그래도 도로 중앙선은 보였던 것 같은데
쉽지 않은 길 상태.

 

 

 

전 날 체크인할 때 여쭤봤을 땐 체크아웃 이후에 호텔에 잠깐 짐을 맡길 수 있다고 하셨는데.

아마 영어 소통에 문제가 생겼었던 것 같다. 체크아웃하며 짐을 맡기려고 하니 안된다고 하시길래 구시로역의 코인 락커에 짐을 넣으러 가는 중이다.

 

아침 9시, 실시간으로 눈이 내리고 있음에도 도로와 인도는 이미 제설이 다 되어있었다. 작은 가게의 사장님들은 가게 오픈을 위해 문 앞의 눈이 너무 많이 쌓이지 않도록 너까래로 슥슥 밀고 계셨다.

이 분들에게는 아침 운동같은 자연스러운 하루 일과인 양 보였다.

 

 

제설차.

 

 

눈이 많이 쌓인 구시로 거리의 풍경은 전 날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언제 이렇게 벌써 치우셨대

 

 

도로 가쪽으로 밀어낸 눈의 양이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2미터는 족히 됐다.

 

한산한 구시로역의 개찰구.

 

구시로 역의 코인 락커는 삿포로역과 다르게 모니터 없이 수동 열쇠 개폐 방식이다. 방향을 헷갈리면...

 

잠이 덜 깼는지 눈을 너무 많이 맞았는지 그냥 머리가 멍청한 건지.

캐비닛 오른쪽의 열쇠를 뽑아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돈을 캐비닛 왼쪽 동전 투입구에 넣고 열쇠를 뽑아 버렸다.

스스로에게 조금 수치스러웠지만 멍청비용이 400엔 정도면 선방한거지. 주섬주섬 400엔을 다시 만들어 왔다.

 

아직 전 날 봐둔 식당 문이 열기까지 한 시간도 더 남았기에, 우선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기로 했다.

 

구시로역 바깥쪽에도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깔짝 있었다

 

 

 

구시로 역에서 바깥으로 나오면 제일 먼저 만나볼 수 있는 그레이스 교회.

건축에는 문외한이지만 엄청나게 웅장하지도, 독특한 건축 양식이 보이는 것 같지도 않았음에도 눈이 소복히 쌓여 만들어진 이국적인 모습이 여행자에게 설렘을 느끼게 하기엔 충분했다.

 

구시로역 앞. 어디까지가 도로고 어디까지가 인도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눈은 점점 그치고, 해가 뜨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눈 앞도 온통 하얀 색이었다. 햇빛이 들자 사방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조금 술을 마신 것처럼 헤롱헤롱해졌다.

 

구시로의 에베레스트.

 

 

가고자 하는 식당이 구시로 강 근처에 있었으므로, 다시 숙소 주변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갔다.

 

누가 봐도 도매 회 센터.
오른쪽 위의 포스터가 내가 타려고 했던 열차였다.

 

강을 따라 숙소가 있던 방향의 반대쪽 방향으로 내려가자 큰 어시장같은 것이 나왔다. 사진으로 따로 남기지 않은 무슨 거대한 복합몰같은 현지 시설도 있었는데, 딱히 들어가 볼만한 매력은 느껴지지 않아서 들어가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현지 시설들이라 그런지, 구시로의 다른 곳에 비해 활기찬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행인들이 보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차로 생선들을 대량으로 실어나르는 통행이 많아서 그런지, 제설이 잘 되어있던 차도와는 다르게 인도는 전혀 제설이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구시로 강가로 되돌아왔다.

 

거의 무슨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에 나올 법한

 

구시로 강, 누사마이 다리.

 

 

생각보다 넓고  시원하게 탁 트인 강의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태평양으로 흘러 나가는 물이라 그런지, 잔잔하고 짠 냄새가 불어왔다.

강을 따라 정박해 쉬고 있는 어선들의 출렁임이 아니었으면 그냥 완전히 멈춰있는 풍경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이 누사마이 다리는 세계에서 일몰이 가장 예쁜 다리 중 하나로도 유명한 편이다. 구름이 잔뜩 끼어 이번엔 실패했지만, 언젠가 다시 오게 된다면 일몰을 감상해 볼 수 있기를.

 

누사마이 다리를 따라서는 여신상 비슷해보이는 조형물이 있는데,

 

춘. 새똥인지 뭔지 모를 저 머리의 흰 것도 품어주는 온화함 그 자체.
하. 신났네
추. 풍족한 계절
동. 하긴 저기 서서 겨울 강바람을 맞고 있으면 저런 표정이 당연하겠지

 

무슨 전설이나 스토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직관적인 느낌만으로도 좋았다. 특히 겨울의 얼굴만 처참하게 벗겨진 것도.

 

다리 아래쪽으로 내려가볼 수 있는 계단이 있어 살짝 내려가 보았다.

 

제설 상태만 봐도 가도 되는 길인지 안되는 길인지 알 수 있어 좋았다.

 

꽤 깊지 않나 싶어 보이는 색이었다. 둥둥 떠있는 얼음들이 꽤나 차가워 보였다.

 

 

다리 아래로 지나갈 수 있는 통로.

 

 

시선의 높이에서 잔잔히 뜬 강물을 보니, 뭔가 내가 지금 인공 섬 위에 둥둥 떠서 흘러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누사마이 다리의 반대쪽 전경.

 

실제로 작동하는 시계였다.

 

뭔가 저 옆에서 사진을 찍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의 포토존이지만, 조형물까지 들어가는 길이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아직 아무도 눈밭을 헤치고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나보다.

 

물을 구경하는 것 만큼 시간을 빨리 뺏기는 방법은 잘 없는 것 같다.

어느새 식당 오픈 시간이 꽤 지난 11시 반 정도가 되었으니, 슬슬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의문의 한국어. 한식당인 것 같았다.

 

환갑이 넘었다고 하는 경양식집, '이즈미야' .

 

구시로에 오기 전날 밤, 알아보니 구시로 현지 사람들이 꽤나 즐겨 찾는 전통의 경양식 가게라고 한다.

이곳은 철판에 "스파"게티와 경양식 돈"가스"를 함께 올린 '스파카츠' 가 유명하다는데, 이 가게에서 개발했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아마 종목이 종목인 만큼 관광객들이 부담없이 찾기 좋고, 나름 현지식이라는 것, 그리고 넓은 가게와 찾기 쉬운 메뉴 등 여행자 입장에서 가볍게 고르기 좋은 가게라서 더욱 유명해진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특별히 정해진 다른 메뉴도 없었기 때문에 한 번 들러보자 싶었다.

 

1층에 전시된 스파카츠 모형. 비쥬얼을 보고 맛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식당은 2층이었다

 

입장하면서 손소독 칙칙 하고 당당히 "히토리데스 (혼자입니다)" .

전형적인 오래된 경양식집 인테리어였지만, 현지식 답게 혼자 테이블을 하나씩 잡고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시는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이 보였다. 뭔가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낯선 조합인 것 같기도.

 

일본어를 몰라도 대충 35년 어쩌고가 붙어있는 맨 위의 메뉴가 스파카츠인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메뉴판과 기본 상차림
내부 인테리어.

 

아노, 스미마셍.

스파카츠 히토츠, 소시테 코오라 오네가이시마스.

 

이정도 발전이면 나름대로 뿌듯함을 느낄 만 했다. 자신감 있게 일본어를 뱉은 게 어디야.

 

 

 

스파카츠의 맛은, 특별하진 않지만 특이하다고 하면 적당히 맞을 것 같다.

일단 저 철판이 달궈져서 나오기 때문에 소스가 지글지글 끓는다.

소스는, 뭐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 지 모르겠지만 적당한 경양식 소스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과일 향이 들어간 느낌이랄까.

독특하다고 느낀 건 스파게티 면이었다. 돈가스를 먹을 동안 계속 끓을 걸 생각해서였는지 그냥 면이 원래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 면이 쫄깃 내지 단단한 느낌이었다. 돈가스로부터 적당히 흘러나온 기름이 스파게티 면과 잘 버무려져 나름 괜찮은 조화를 이루었다.

 

분명 아는 맛들의 조합이지만, 그런 스파카츠를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든 건 아마 저 아래의 철판과, 노신사 웨이터분의 여유인 것 같았다.

 

다 먹고보니 이거 탄수화물 폭탄이다. 양이 꽤 많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문득 여기가 바다도시라는 걸 상기해냈다. 바다 냄새가 전 날 기차에서 봤던 태평양의 모습을 자꾸 떠오르게 했다.

지도를 켰다. 해안가는 아니지만,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 그리 멀지 않았다.

시간도 남겠다, 태평양을 맘 놓고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