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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적 여행기

[221028~221029, 부산] 고생을 힐링이라 부르면 맘이 편하다

0. 서문

솟구치고 추락하며 파도 위를 날으는 새여,
끝이 없는 이 해변에 모래 한줌 쥐었대도
놓아주오, 다 보내주요, 너는 하늘을 날으는 새요,
성긴 외로움도, 눈물도 바람결에 던져 주고 ...

<Lucia(심규선) - 바다새의 노래>

언제까지 축 쳐져 있을래,

올해 나에게 제일 많이 한 말이다.

2021년 12월 갑작스레 들려온 비보와 함께,
반차를 내고 심장내과에 다녀왔던 나는 한 시간 만에 팀장님께 다시 조퇴를 말씀드릴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장례식장부터 가봐라, 이따 있을 아이디어 미팅은 내가 H님께 잘 말씀드려 보겠다, 팀장님의 컨펌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짐을 싸고 수원으로 향했었지.
그러면서도 이후의 내 삶에는 큰 변화가 없을 거라 확신했다. 부모님이나 엄마 딸도 아니니, 그냥 관성적인 일상으로 별 문제 없이 돌아올 거라고.

새해가 밝음과 동시에 대물림된, 애증보다 큰 증오가 날 움직이기 전까지는 그랬다.

2022년의 난 악착같았다.
학교에 복학했지만 마음이 붕 떠있던 나는 어디에라도 소속되고 싶었고, 무언가에라도 몰두하고 싶었다.
그게 날 세종문화회관으로 덜컥 발을 딛게 했다.
도저히 내가 핸들링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재밌었다. 좋은 사람들, 평생 내가 속하지 못할 분야(심지어 좋아하는 분야)의 일원이 된 느낌. 게다가 배우는 것도 많았다.
그 반년동안 그곳은 어쩌면 내 도피처였다. 사건번호 C-14 조차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미화되었다(자세한 건 영업비밀로 남겨두겠다). 자세히 기록할 필요는 없는 법적인 문제와 나에게까지 직접적으로 떨어진 돈 문제 등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를 불안한 것들 틈에서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음을.

지난 두 달, 그러니까 22년 9월과 10월은 정말 꽉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어셔 퇴사할 때의 나와는 퍼포먼스 적으로 딴판인 사람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과학이 그렇듯,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무언가를 잃는 법이다. 나는 여유를 잃었다. 경험으로, 사람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걸 경계하였으나 그마저도 타협되었다. 인간적인 관심이라도 포착되면 잡아내려고 엉겨붙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었으나 인별도 같은 맥락이었던 것 같다. 수 년간 만들어온 나에 대한 내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던 탓이다.
붕 떠있는 기분. 한 순간도 차분하지를 못해 일상에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에 일이나 공부 말고는 다른 게 들어서지 않은 것 같았다. 진짜 제일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난데. 나에게 실망이 또 한 층 덧씌워졌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내 손가락은 부산의 모 호텔을 예매하고 있었다. 9월 말이었다.

나는 INTJ다. 그것도 넷 다 70대 30 정도로 극단에 있는 편이다. 근데 가끔 이렇게 제멋대로 튀어나가 버릴 때가 있다. 일단 몸이 이끄는 대로 가다 보면 왜 부산이었는지 나름대로 정리가 되겠지. 그렇게 중간고사를 성황리(?)에 치르고, 즐거운 고.전 날이 되었다. 고양으로 올라가는 사람들 틈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날이 되었다.

0-0. 준비

11월 중 혼자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P 인간(25, 직장인(진))

솔직히 딱히 설레거나 기대되진 않았다.
그냥 시험이나 빨리 끝났으면 싶었다. 그동안 짬(?)과 날밤까기로 커버되던 생물만 보다가 생판 처음 보는 공대 전필, 학교에서 악명높기로 유명한 통계 전필들을 멘 땅에 해딩으로 준비하자니 정말 비교도 안되게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할 건 해야지 하며 기차는 싸게 알아보았다(내일로 열리는 날 계산해서 잊어버리지 않게 캘린더에 적어두었었다).

뭐 어디 갈지 동선이나 먹을 것 정하지도 않았으면 100퍼 즉흥여행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문득 오여정 나왔던 감천마을은 가야겠다, 회는 요즘 뭐가 제철이더라, 부산역에서 멀지 않은 돼지국밥 어디 유명하던데 웨이팅 없으면 가봐야겠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날 보면 어이가 좀 없긴 했다.

아무튼, 10월 28일 아침이 밝았다.

1. 첫째 날

1-1. 시작부터 뭔가 잘못되었다

일어나라 인간아

산뜻한 아침이 밝았다.
아, 산뜻하다?
나 어제 마틸다 보고와서 1시에 잤는데. 6시 알람이라 5시간밖에 못 잤는데.
그러고보니 알람도 안울렸네.

..........어라?

지금 시간이 7시 6분. 기차는 7시 50분.
정릉역에서 서울역까지 대략 40분. 출근시간 우이신설선은 한두대는 그냥 보내야 하니, 5분정도 더 걸린다 치고.
안 씻고 바로 나가면 탈 수 있을까?
당연히 안되지. 아, 내일로라서 다행이다. 취소 수수료가 없네.
가만, 그럼 버스도 못타잖아. 케텍스가 남는게 있나?
어림도 없네. ITX? 이거 새마을호잖아? 네시간 반?
음...

일어나서 ITX 예매하기까지 딱 1분 걸렸다. 뭐 오랜만에 기차여행 감성도 좋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짐을 아침에 싸는 건데, 내려가서 첫 일정 계획까지는 생각해 둔 터라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기차를 놓쳐본 건 살면서 딱 두 번, 그리고 그 두 번 다 이번 달이다. 요즘 정신을 빼놓고 살긴 하는구나.
아무튼 느긋하게 런닝맨 유튜브 클립 한 편 보고 느지막이 출발해서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에서 뭘 타 볼 줄이야.

후암동은 정말 익숙한 동네다. 3년 쯤 전, 이곳에서 반 년정도 살았었다. 후암 우체국에서 숙대 입구역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감자탕집 꽤나 괜찮았는데 언제 한 번 다시 가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
아무튼, 너무 오래돼서 잊고 있었다. 9시 전후의 서울역은 사람이 정말정말 많다. 그때 당시 월화수목 1교시로 어메이징 1호선 속에서 학교까지 통학하던 그 아찔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제는 같이 살던 사람도 서울에 없고, 나도 이 동네에는 더 이상 용무가 없건만(어쩌다 본가를 갈 때도 보통 용산역을 가지, 서울역은 정말 올 일이 없다) 이런 계기로 오다니, 태극기와 머리에 띠 두른 아주머니들이 없는 서울역 광장은 굉장히 평화로웠다. 아 아직 금요일이구나. 주말 아침마다 열리는 성대한(?) 행사 때문에 반 강제 건강한 아침형 인간으로 살았었는데.

새마을호는 처음 타본다

무궁화호는 타봤어도 새마을호는 처음 타본다. 늦잠 덕분에 좋은 경험 하는거지.
아, 근데 새마을호 책상이 좀 많이 작다. 케텍스 절반 크기다. 태블릿 올려두기도 쉽지 않았다.

문득 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아직 체득하지 못했나보다. 이틀정도 뭐 안한다고 나중에 굶어 죽을 것도 아닌데.
물론 해야 할 게 많긴 했다. 원서까지 한 달, 그러니까 일주일 뒤에 보는 텝스에서 점수를 만들어야 하지만 아직 시작 조차도 안했고, 논문 두 편을 완독하고 거기의 소스코드를 내 코드로 짜는 프로젝트를 완성해야 한다...만 아직 논문에 나온 수식 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난 논문을 폈다.

잠에 들기까지 5분 걸렸다. 한 숨 푹 자고 일어나서 논문이고 뭐고 집어 치우고 혹시 몰라 들고 온 <웃는 남자> 대본집을 폈다. 60번 가까이 본 극인데, 이제 드문 드문 음이 기억나지 않는 소절도 생겼다. 문득 한 헤드 어셔님이 떠올랐다. 아마 난 평생 누구에게든 부족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겠지. 이제 어른이니까, 부족한 나를 온전히 채우려 하기 보단 타인의 손을 빌려 보는 것도 좋겠다. 나름대로 마음이 푸근하겠지.

초미세먼지가 심한 날이었다. 이제 여명을 완전히 지우고서 고개를 든 날은 여전히 뿌옇지만, 구석구석 해가 들기 시작하면서 차창 밖으로 젊은 초록과 낡은 여름의 빛이 선명히 빛났다. 그 사이로 드문 드문 보이는 한적한 시골길,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삶의 흔적. 아마 그 세계에선 가장 빠를 이 느려터진 새마을호를 타고 지나니 가벼운 향기가 났다. 내 별 볼일 없는 아득바득한 오기보다 이 사람들의 현재가 훨씬 값어치 있음에, 어쩐지 주마등을 본다면 이런 이미지이지 않을까 싶었다.

기차가 도착할 생각을 안 했다. <웃는 남자>처럼 가벼운 <이토록 보통의> 대본집도 들고 올걸.

1-2. 국 밥 돼지국 밥

일단 이 제목 보고 MissA 노래가 떠오르면 당신은 늙ㅇ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또 역시 아닌 척 하면서 아웃풋을 내러 온 게 아닐까. 자랑하고, 썰 만들고, 나 아무튼 쉬기 위한 액션을 취했다 광고하려고.

그리고 이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매 번 못 고칠 습관이라면 제대로 한 번 해보자.
왜 내가 그걸 하면 안되는지, 미친 척 하고 하루 돌아다녀보고 결과를 눈으로 보자.

혹시나 해가 굉장히 뜨거울 걸 대비하고 가져온 버킷햇을 꺼냈다. 눈을 가릴 정도로 푹 눌러 썼다.
인스타 피드라는 걸 올려볼까 사진을 뒤적거렸지만 아직은 허세를 부릴만한 게 없었다.

이제부터 숙소 들어갈 때까지 거울 금지라고 생각했다.

식당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부산역 앞에는 영도인가 영동인가 돼지국밥 집이 꽤나 유명하단다. 나도 어디선가 주워들어본 기억이 있다.
네이버 맛집 태그에 '#혼밥하기 좋은 곳' 딱 적혀 있길래 가보려 했다. 두 시가 넘었으니까 사람도 적당히 없지 않을까.

음 어림도 없지. 웨이팅이 건물 밖으로 나와 있길래 자연스럽게 다른 곳 가려 했던 척 일단 움직였다.
프로 혼여러이자 프로 혼밥러인 나에게 이정도 변수는 익숙하다. 학교 앞 식당에서도 사람 많으면 자연스럽게 근처에 용무 있는 척 돌아다니던 나다.

아무튼 3분 거리 안짝에 아주머니께서 한가로이 양파를 까고 계시던 24시 국밥집을 찾아내었다. 조심스레 지금 식사 가능한지 여쭙고, 감사의 탭댄스를 추며 돼지국밥 한 그릇을 부탁드렸다.

사실 부산 돼지국밥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국밥 자체는 좋아하는데, 전라도 인간이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먹어오던 창평식 맑은 국물의 내장국밥에 입맛이 맞춰진 탓이다(년에 두어번 본가 내려갈 때마다 혼자라도 꼭 먹고 오는 음식이다). 하지만 첫 끼니로 돼지국밥을 선택한 것은, 출발 전에 에너지바 하나만 먹었던 터라 배가 많이 고팠고, 기차를 오래 탄 탓에 국물 있는 한식이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산의 돼지국밥은 항상 틀리지 않는 선택이긴 했다. 숨겨진 맛집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냥저냥 무난한 국밥 맛이라기엔 좀 진한 느낌이었다. 반찬까지 다 털어내고 기분 좋게 식당을 나왔다.

이게 종로여 부산이여

본래 첫 일정은 감천마을이었으나, 와서 보니 급하게 감천으로 떠나기 보단 다른 곳을 먼저 찍고 싶었다.
그렇게 떠오른 게 흰여울 문화마을. 국밥 하면 변호인이고 변호인은 흰여울 문화마을이라 그렇게 정했다.
82번 버스를 타고 가다보니 무슨 종각역 근처 지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뒤로 10분 쯤 지났나, 영도대교를 지나자 마자 부산이 되었다.열린 버스 창틈 사이로 바다의 짠내가 훅 들어왔다.
아, 여행을 오긴 왔구나. 여기가 부산이긴 했네.

1-3. '흰'여울 문화마을에서 '흑'역사를 만들어 보자

(이때만큼은)국내 최고의 힙 가이, 나 등장.
물 빛이 좋길래. 어릴 땐 저 길을 따라가면 해까지 닿을 거라고 믿었다.
여기 바로 앞에 아파트 있던데, 거기 주민분들은 이런게 질리시겠지.
다른 곳도 바람이 심했지만 해안터널 안은 진짜 허리케인 급이었다. 여기선 포기하고 모자를 벗고 다녔다.
계단 어우 유산소 좀 해야겠음
흰여울 하면 포카리색 조합이지

무수한 인스타 인생샷 생성의 현실을 눈으로 목격했다. 세상에, 핫 피플이 되려면 저 정도는 노력해야 하는구나. 난 당장 멀었다.
그들의 열정 앞에선 나 같은 Wlsㄸㅏ는 괜히 눈치보고 쭈글거리게 되었다. 혼자 흰여울 오신 분은 정말 단 한 분도 안 계시더라.

저 초록 벽에 빨간 머리방 간판이 너무 잘 어울리더라구
실제론 이렇게까지 우중충하지 않았었는데...?

5월 즈음에 강릉에 한 번 혼자 다녀 왔었다.
그 때 굉장히 추웠던 것을 교훈삼아 꽤 두껍게 입고 나왔는데, 이놈의 나라는 중간이 없는지 이 날은 더웠다.
그러나 난 핫 피플, 날씨 따위에 굴복하여 내 착장을 수정할 순 없다.

바다의 색감을 잘 담을 수 있는 카메라가 있다면 나는 앞으로 바다에 다시 올 필요가 없었겠지.
기차를 타고 오면서는 낡은 여름을 마주했는데, 부산은 이 사람들의 생기를 받아 다시 싱싱하게 살아났나보다.

슬슬 혈중 카페인 농도가 떨어져 갈 무렵, 돌아가려다 눈에 들어온 카페.
덥다
역겹다. 니들은 이런거 하지 마라...
구도 감성 진짜 한 번 해보려다가 현타가 몇 번을 왔는지.

이 때쯤 피드를 올린 것 같은데. 올리고 인스타에 한참을 못들어갔다(난 디엠이고 뭐고 인스타 알림을 다 꺼두었다).
예상하는 반응이 있었고, 역시 그대로였다. 날 오래 본 사람일수록 이새ㄱ가 드디어 공부하다 머리가 나갔나 싶었을게다.
당장이라도 내려야겠다 10초에 한 번씩 생각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스토리 관종이 되어버릴 지도 모를 내 정신머리를 위한 치료라 치고, 딱 하루만 참자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오늘의 컨셉이니까.

뭐 그래서 결국 버티지 못한 나는 폰을 끄고 그냥 걸어다니기로 했다.

이 날 올라갔던 피드는 다음 날이 되자 마자 바로 아카이브에 들어갔다. 혹시나 또 갬성ㅊ이 되려고 할 때마다 꺼내 봐야지.

1-4. 영도대교 올라가는 거 나도 볼 줄 아는데

흰여울 가면서 생각한 컨텐츠가 있었다.
영도대교 걸어서 건너기.

영도대교는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다리가 열린다고 한다.
일찍 도착했으면 가는 길이니까 한 번 봐보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네.
아쉬운대로 밟아보기라도 하자 싶었다.

짠내가 훅 났다. 수산시장 냄새.
차들이 막 지나다녀서 가만히 서 있기에 좋지는 않았다
다리 위에서는 필름카메라로만 몇 장 찍었다. 해질녘 물 빛이 예쁘긴 했다.

이게 왜 대굔가 싶긴 했다. 내 걸음이 좀 빠르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같은 생각이 막 들 무렵, 무심코 내려다 본 바다는 정말 예뻤다. 한 쪽은 남포시장과 마을이, 다른 한 쪽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어촌마을같은 풍경이. 바다를 낀 도시의 강인한 생애가 짭조름한 냄새를 타고 날아다니는 듯 했다.

그래서 무작정 주변을 좀 더 돌아보기로 했다.

영도의 뒤틀린 회전목마
둘기님 올라가지 마래요
죄송해요 가시던 길 마저 가세요
시장만 보면 향수가 살아난다

필름 카메라를 쓸수록 점점 참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이 포스트의 사진은 전부 핸드폰 카메라다).
지금 보는 각도가 가장 알맞고 예쁜 것 같으면서도, 또 어디선가 본 것도 같고,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고 찍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카메라를 내려놓게 된다.

일 년 이 년이 지나면서 참아야 할 것들이 늘었고, 어느샌가 참는 게 당연해진다.
그래서인지 무언가를 해서 행복하다기보단 못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아진다. 우유와 버터와 치즈를 이따만씩 쓰면서 파스타를 해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고, 밥 하기 귀찮을 때 배달앱에서 주문하기를 누를 수 있는 여유가 돼서 다행이고, 오늘 따라 내 얘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인 그런 느낌.
마치 딱 전 날 봤던 뮤지컬 <마틸다>의 넘버 <When I grow up>이 찡하게 다가왔던 게 그래서인가 보다.
어느 순간 난 어리다고 불리기 애매한 위치에 와 있다. 하지만 미성숙하고 세상 일에 어려워하는 풋내기이다.

법원 서류와 전세 보험 문제로 혈육과 전에 없이 다투던 당시 '너가 알아봐야 뭘 안다고 말만 번지르르 하냐.' 라고 소리지르던 그의 말이 왠지 씁쓸하게 납득이 되었다. 법령이나 규정의 글자들을 암만 들이밀어도 거기엔 실제로 내 것이 없는데.

약간 역사 전체적으로 서울의 화장실 타일 감성보다는 목욕탕 감성이었다.

딱히 더이상 갈 곳도 없었고 숙소가 있는 광안리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니, 금요일 퇴근 시간이 되기 전에 가서 체크인이나 해 두자 싶었다.

1-5. 광안리에서 60대 어머님들의 오빠 된 썰 푼다

내려서 한 5분 정도 걸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나 이 길 걸어봤었네.
11월에 유럽간댔던 P 친구가 입대하기 전, 그러니까 자그마치 4년도 더 됐는데, 그 때 몇몇 친구들과 부산에 왔었다. 그 당시 숙소가 어딘지 몇 년간 기억해내지 못했는데, 와서 보니 그게 광안역 앞이었다.

금요일 밤인데 생각보다 광안리가 조용했다. 너무 강남역 한 복판을 예상했나.

이게 13만원 플렉스?

호텔은 살면서 본 숙소중에 가장 넓었다. 몇년 전 과 동기들과 상하이에 갔을 때 세 명이서 썼던 방과 비슷한 크기였다.

영혼을 담은 광안리는 역시 필카로 담았다. 달과 노란 국화와 함께.

회가 먹고 싶어 무작정 회 타운에 들어갔다. 뭐 딱히 제철 따질만한 게 없으니 무난한 광어로, 관광지 회 타운이니까 키로당 3만정도 하려나, 하면서 갈 때쯤 주변의 소음이 나를 향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빠 한 번 잡솨봐~ 많이 줄게~

워매 어머니... 살짝 어지러워졌다. 어릴 때부터 전통 시장에 많이 다녀서 이런 건 익숙하다 싶었는데 이렇게까지 다 내려놓으셨을 줄이야.

혼여 중에 표정관리에 실패한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꽤나 기념비적인 날이다.

광어 키로반+서비스 멍게

어찌저찌 회를 들고 빗속을 달려 편의점으로 들어가 대선까지 한 병 사온 뒤에, 살짝 고민을 했다.

평소 난 혼여 중 술을 마시게 되면 핸드폰을 안보이는 곳에 던져둔다. 고작 알코올 때문에, 그 꼬장 때문에 그동안 쌓아 올린 걸 발로 차버리면 안되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날 그렇게 잘 믿지 않는다.

그런데 또(사실 왜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술로 문제가 생겼을 때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서 굉장히 조심하는 편인데도) 이 날은, 늦바람 인싸의 감성에 불을 지펴놔서인가, 대선 딱 한 모금 마시고 바로 카톡 프로필을 손봤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정확히 기억은 하기 싫은데, 세종 동기 단톡방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던 것 같고, 갑자기 홀애비같은 감성이 폭발했던 것 같고, 뭐 바다에 나가서 어쩌구그그아아아아아아아가강ㄱ

아마 새로운 내용으로 시끄러워지기 전까지 그 단톡은 안들어갈 것 같다. 뭐하는 짓이지.

아마 자라놈이랑 놀아주는 사람들은 내가 하면 홍대 힙ㅉㅇ가 되는 이런 코디 조합을 실물로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하셔요.

그리고 대충 <사도> 영화 한 편 보고 분리수거를 미리 조금 해 둔 뒤 잠에 들었다.

2. 둘째 날

2-1.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해

아침 7시의 통유리창 오션뷰 호텔은 눈이 부시다.

고층이라 암막커튼을 안치고 잤더니 화려한 채광이 나를 감쌌다.
그래도 술을 많이 먹지는 않아서 다행히 머리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아침 풍경은 너무 눈이 부신 탓에 3초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오션뷰를 처음 긁어봐서 이럴 줄은 몰랐는걸.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든 생각 두 가지.

  1. 술 쳐먹고 폰 만지지 말자니까.
  2. 싱글만 쓰던 사람은 더블베드를 써도 쭈구리다.

침대가 넓으면 뭣하나. 밤 새 한쪽 구석탱이에 쭈구리고 있는데.

날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물에 들어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슬리퍼가 없다면 모래사장도 잘 밟지 않는 편이다. 바다는 멀리서 소리로 들을 때가 좋아.
바다를 보니 물고기 떼가 줄 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다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건물이 감각적이길래. 안에 냉방비 엄청 들겠다

딱히 정해진 목적지가 없었기에, 일단 바다나 무작정 걸어볼까 싶었다. 아침에 숙소 창문에서 봐 둔 등대가 있어서, 거기까지만 가보고 감천동으로 넘어가자 싶었다.

가운데 보이는 빨강 하양이 그 등대다

아 태풍
힌남노 피해로 인해 길이 망가졌나보다. 태풍 때문에 출입이 제한된다고 붙어 있더라.
인생이 뭐 뜻대로만 되면 재밌겠나. 아쉬운대로 멀리서라도 좀 보고 가기로 했다.

광안리에서 수변공원을 쭉 넘어가면 아이파크네 뭐네 아파트들이 쭉 들어서 있다. 그래서인가, 걷기 운동을 즐기시는 동네 분들이 많았다.
음, 절대 여행객의 옷차림은 아니었다.

수변 공원의 거북이를 보는 내 분신 거북이

이쯤 돼서야 이번 여행의 컨셉이 확실해졌다.
둘째 날이 돼서야 카톡 프로필도 원래대로 돌려 놓고, 인스타도 내리고, 옷도 평소에 도서관 다니는 차림으로 편하게 입고 원래의 나대로 무색무취로 돌아왔을 때, 뭔가 알 수 없는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 이게 내 분수지. 몇 년을 이 습관으로 살았는데 남들이 좋다든 싫다든 아무렴 어때.

아무래도 흑역사 만들어보기를 잘 한 것 같다.

뭔가 신이 나서 광안역에서 지하철을 타자는 원래의 계획을 접고 발 닿는 데까지 걸어보자 했다.
10시 반이었다.

약간 군대 가방메고 휴가나온 전문하사정도의 비주얼이었다
11월 말 poetry씨와 웨사스 관극이 예정되어 있다. 나 말고 뮤지컬 좋아하는 남자 인간을 처음 봐서 신기하긴 한데
대전 신세계 아트앤사이언스같다

걷다보니 센텀시티가 나왔다. 나름대로 명물이니까 잠깐 들어가볼까 했다가 이 차림으로는 잡상인 취급도 못 받을 것 같아서 그만뒀다.

광안대교를 걸어서 건너볼까 했는데, 이게 자동차 전용 도로란 걸 초입에 와서야 기억해냈다.
여행 중 처음으로 갈 길을 잃어버려본 뚜벅이다.

대전 신성동에서 카이스트쪽 넘어가는 길에 딱 이런 느낌의 공원이 있다. 가을에 천문대 찍고 많이 갔었는데.

결국 지하철 타러 다시 센텀시티로 돌아왔다.
되게 대전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인턴하던 도중에 우리 팀에 정직원으로 새로 채용되신 분이 계셨다. 만성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나와는 달리, '특별히 내가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싫어할 이유가 없어!' 라는 초 긍정 마인드로 주변에 행복을 전파하고 다니던 분이셨다. 개인적으로 서울로 이사를 올 때도, 같이 술자리를 할 때도, 진로 문제때문에 머리아파 할 때도 아낌없는 조언을 해 주시면서 나를 학생이 아닌 직장 동료로 대해주던 분이셨는데(서울로 이사올 때도 TV 줄테니까 가져가라고 하셨는데 내가 거절했다), 어쩌다 보니 퇴사 이후로는 한 번도 연락을 못드렸다. 만간에 잘 지내시는지 인사라도 드려야겠다.
대전도 참 좋은 동네였는데. 팀장님이랑 잘 지내시나.

2-2. 아미동, 느려서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름 덕분에 내려야 할 곳을 까먹을 일은 없었다

사실 여기 하나 때문에 부산에 오고 싶었다.

지금은 멀어졌지만 부산 전문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를 보러 부산에 몇 번 왔었는데(그리고 경대에서 술먹고 죽었는데), 올 때마다 꼭 들르는 곳이 감천동이었다.
마을의 색감이 사람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매번 갈 때마다 점점 더 북적북적해지긴 하지만.

내려봤더니 병원 앞. 저 현수막 보고 마음의 준비를 했어야

부산대 병원 앞이면 필시 주변에 적당한 밥집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당히 김밥 정도라도 좋았을 것이다.

10월 29일 토요일. 안타깝게도 학교 주변 가게들이 휴무일 내기 딱 좋은 요일이었다.

집념의 곰탕

메뉴는 고사하고 문을 연 곳이 거의 없었다. 하기야 토성역 앞에서 보통 바로 마을 버스를 타고 감천마을까지 올라가버리니, 나 같아도 문을 안 열었겠지.
하지만 집념의 밥심을 탑재하면 한식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은 어떻게든 찾기 마련이다.

냄새가 안맵길래 크게 베어 물었다가...

감천동까지 마을 버스를 타고 갈까 하다가, 빨리 가봐야 뭐하겠나 싶어 그냥 천천히 걸어 올라가보기로 했다.
지도로 보니 대략 20분 정도면 가겠거니 싶었다. 경사가 조금 가팔라 군대에서 다친 발목 인대가 약간 욱신거리긴 했지만, 며칠동안 또 안 쓸텐데 뭐.

광주의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에도 까치고개가 있어 반가워서 찍어봤다

고갯길이 약간 해방촌에서 남산쪽으로 올라가는 분위기였다. 걸어 올라가보기는 또 처음이라, 아미동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비석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이 있었는 줄은 또 처음 알았다.

길냥이

무념 무상으로 고개를 오르던 중 대충 만든 것처럼 보이는 문짝이 있었다. 이런 포토존 비슷한 걸 몇 개는 지나쳐 왔기에 이번에도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이걸 어떻게 그냥 두고 올라가

날씨가 막 그렇게 맑은 날은 아니었다.
이곳의 부산과 아침에 걷던 바다가 보이는 부산은 다른 공간인 양 했다.
그러나 이 높은 곳에서 저 멀리 보이는 광안대교와, 부산 타워.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 멀리에 있었던 것이 마치 꿈결인 양 해서 잔잔한 전율이 일었다.
왠지 모르게 혼자 피식 피식 실실 웃음이 나왔는데, 보통 버스타고 올라가는 길이라 망정이지 누구라도 근처에 있었으면 뭐야 저 미친인간은 했을거다.

잠깐 앉아 있었던 비석문화마을쉼터.
덩어리진 걸 보니 포유류인데 그럼 범인(?)은 고양이인가
밤에 보면 조금은 무서울 것 같은 '아미동'씨. 명찰에 아미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미동 버스정류장이 무슨 갤러리를 보는 것 같다

부산 타워를 가볼까 했지만, 여기서 보는 경관과 별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아 다음을 기약했다.

조용하고, 주민 분들의 시계도 함께 돌아가는 곳.
이불터는 주민분, 동네 슈퍼에 만나서 깔깔 웃으시는 어머님들, 담배 한 대 물고 골목 구석에서 오토바이를 꺼내시는 아버님.
지나온 그 분들의 생애 곁을 지나기만 했는데도 잘 익은 재료로 끓인 한식의 향기가 났다.
주제 넘게 감히 누가 누굴 평가하는 양 말하냐마는, 좋은 시간도 힘든 시간도 옹기 속에 푹 묵히면 맛있는 장이 되는 걸지도.

무슨 이세계로 통하는 문 같아서, 귀여워서 찍었다
해가 들길래.
여기까지 견인하러 올 바에는 그냥 두는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 분들께 오늘은 얼마나 무거운 시간이려나

오르다보니 '구름이 쉬어가는 전망대'라고 길 복판에 홍보를 하는 팻말이 보였다. 원래 길에서 살짝 빗겨나는 길이지만, 그래도 가깝다 하니 잠깐 들르자 싶었다.

저 위에 구름도 피해가는 것 같은데

많이 쉬라고 하자.

길 끝이라길래 차도 끝일 줄 알았더니 퓨어하게 낭떠러지일 줄이야.
틈새기로 샛길이 보이길래 들어갔다가 동네 고양이 5마리의 미팅을 방해해 버렸다.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인간은 도망갈 수밖에
비디오 가게를 얼마만에 보는거지
웨어 하우스라는 이름의 카페겠지 하다가 진짜 웨어하우스로 쓰이고 있는 걸 보고 새삼 사람 일 어떻게 되려나 싶었다

있는 낭만 없는 낭만 다 챙기느라 아미동만 한 시간을 넘게 올라왔다.

2-3. 감천문화마을에 가는 날이 장날

차가 장난아니게 많다

초입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아니, 아무리 주말이래도 아직 시간이 정오 조금 지났는데 벌써 사람이 이렇게 많아? 외국인도 엄청나게 많았다.
골목을 걸어다니고자 했던 당초의 계획은 입구에 들어갈 때부터 접었다.

대만 지우펀에 온 것 같았다
'감천문화마을 골목축제'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시끄러운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설치된 무대가 바로 근처에 하나가 더 있었고(차마 가보지는 않았다),

따봉 날려드리고 두어마디 섞었다
이게 부산이여 홍대여

곳곳에서 버스킹도 열리고 있었다.
슬슬 커피도 마시고 싶었고, 여기선 도저히 못돌아다니겠다 싶어 좀 한산한 카페를 물색했다.

저희 물품보관함 이용은 203게이트 앞에서 무인으로 가능하세요~
방탄 부산콘 한다지만 이렇게까지...?
이거 스팟 찾고 찍고 있으니까 외국인 부부께서 와우 어썸! 하고 지나가셨다

결국 적당한 카페를 찾아 루프탑을 전세내고 혼자 드러누워 버스킹을 배경음악삼아 조금 쉬었다.
혼자 하는 여행의 좋은 점은, 어디든 언제든 멈출 수 있는 것. 그리고 포토존을 미련 없이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을 전체에 잔잔한 떨림이 보이는 날이었다. 그 때문인지 어린 왕자 줄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 절반 넘게 줄어 있었던 것 같다.

인테리어 행

그리고, 감천동의 가장 높은 이 곳에서 카메라는 결국 필름을 다 쓰고 장렬히 전사했다.
아 아직 인화할 용기가 없는데. 조금만 기다려.

토성역으로 바로 다시 내려가려다, 문득 불상이 보여 발길을 틀었다.
아미산 대성사. 예전에 템플스테이 했던 천축사의 느낌이 살짝 나는 듯 했다.

고양신의 가호가 있는 성스러운 곳
연출이 아니라 얘가 날 보더니 휙 일어나 절 안으로 들어가는 중에 힐끔힐끔 돌아보며 내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결국 들어가지는 않고, 멀찍이서 한참 바라만 보다 합장만 하고 내려왔다.
난 무교다. 그러나 템플스테이를 했을 때 보살님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되게 편하게 다가왔어서, 불교계에는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2-3. 사서 고생, 그리고 우연

확률은 0과 1 사이에서 정의되는 함수다. 0과 1을 포함한다.
그러나 확률이 0인 것과 0이 아닌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이분법적으로, 되냐 안되냐를 단언할 수 있고와 없고의 차이다.

아마 네이버 지도가 점지해 준 대로, 정해진 빠른 길로만 다녔다면 이 모든 가능성은 생겨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올라왔던 길을 다시 그대로 내려오는 건 그 나름대로 좋은 의미가 있다. 같은 길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걸으면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다시, 아미동
최고급 원두라는 문구가 살짝 끌리긴 했지만 난 예가체프 G2 원두가 아니면 굳이굳이 커피를 도전을 하지는 않는다
숏컷 발견

토성역까지 다시 내려온 뒤, 발길 닫는 대로 용두산 공원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부산 타워가 멀지 않게 보였거든.

지도 없이 걷다 닿은 혈육의 직장의 다른 지점. 공기업이다.

무난히 걷다 웬 번화가가 나왔다. 지도를 보지 않고 느낌대로 이 방향이 맞겠거니 하고 가다보니, 이때는 여기가 중앙역 근처일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갑자기 만난 자갈치 시장. 이때 뭔가 잘못 됐음을 깨달았어야 했다.

'국제' 지하쇼핑센터 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지만 이 역시 주의깊게 보지 않았다.
단지 '미술의 거리'라는 이름에 혹해 한 번 들어가 보기나 할까 싶어 무작정 내려가봤다.

별 건 없고 이런 갤러리들이 쭉 늘어선 지하도였다. 한 번 슥 둘러보고 다시 땅 위로 올라왔다.

어라?

갑자기 국제시장이 나왔다.
약간, 아니, 굉장히 당황했다. 이번 여행에 이런 정신없는 곳은 계획에 없었는데.

아마 이 쯤 눈알이 살짝 돌았던 것 같다.
나 자라, 오사카 여행 이틀 차에 혼자 싸돌아다니다 일본 현지인에게 길을 안내해 준 경력이 있는, 지도 없이도 잘 사는 남자.
어떻게든 용두산까지 걸어갔다가 부산역을 찍고 말겠다. 저녁을 포기하더라도, 지도 없이.
쓸 데 없는 오기와 함께,

전 날 영도대교 본다고 왔던 남포역을 기점으로 방향을 잡고 출발했다.
15시 40분, 일행도 없겠다, 시간도 좀 남겠다. 프로 뚜벅이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무작정 걸었다.

저 저 부산타워가 사람을 오기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단 말이지.

20분 정도 골목 사이를 헤맸을까.

속이 다 시원했다

쬐끄만 아이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방방 뛰는 곳이었다.
부모님이 오든 말든 앞만 보고 무작정 달려나가는 아이들이 계단에서 넘어지지는 않을까, 괜시리 아이들 속도에 맞춰 발걸음이 느려졌다.
애들은 모르는 아저씨가 자기들 보고 있던 걸 알고나 있었을까.
여튼 요즘 아이들은 균형감각이 탁월하다. 그런 자세로 뛰어 다니는데 한 번을 안넘어지더라.

선생님...?

금난새는 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한국 클래식계의 거장이시다.
도착한 것이 16시 15분 즈음. 공연은 15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앉을 곳을 찾고 바로 자리를 잡았다.

야외 특설 무대에선 내가 익숙한 공연장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대화,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웃는 소리 모두 음악의 일부가 되었다.
조만간 체임버홀 공연이라도 예매해서 한 번 다녀올까 했었는데, 의외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생님의 야외 무료 콘서트의 음악을 듣자니 그 간 증오랍시고 알량한 감정을 품고 있던 내가, 이게 잘 하는 짓인가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문제는 현재의 문제일 뿐이다.
당장 사는 게 좀 힘들어졌을 지라도, 적당한 옹기에 담아 푹 익도록 내버려 두면 그 역시 좋은 음식에 쓰일 재료가 될 것을.
나는 아직 어리고, 더 자라야 할 사람이었다.
누가 뭐라고 무시한다고 생각되었던 들, 그것이 그런 것이 아님으로 겸허했어야 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팝송 무대를 포함해 딱 세 곡만 들었다. 왜냐면, 그러고 공연이 끝났기 때문이다.

부산 타워는 굳이 올라갈 생각이 없어 그냥 용두산 공원을 빠져나왔다.

뚜벅이 최적화 착장

복지리도 먹고 싶은데.
펍도 정말 좋아하고(난 소맥보단 드래프트 맥주나 칵테일, 와인을 좋아하는 편이다).
마지막으로 가본 게 언제였더라.

어느 순간부터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은 자연스레 '언젠가, 다음에.' 로 미뤄 버렸다.
괜시리 씁쓸해졌다. 아마 앞으로도, 알면서도 여전히 그러겠지.
그저 그 '언젠가, 다음에'에 조금 빨리 닿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돌아섰다.

중앙역에서 부산역까지 걸어가는 길

쉬거나 앉아 있던 시간 빼고, 하루동안 걸은 시간이 6시간을 돌파했다.
슬슬 허리가 굽고, 다리가 붓고, 몸의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광안리 바다를 봤던 게 몇 주 전 일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결국 도착은 했다

오기와 집념으로 결국 걸어서 도착해냈다.
그래, 지하철이야 어차피 서울 올라가자 마자 바로 탈건데 굳이.
당이 부족했고, 역 앞에 롯*리*가 보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기를 포기하지는 말자 하여 결국 맘*터*를 찾아 내었다.

특정 프랜차이즈에 대한 비하의 의도는 없음을 밝힙니다. 저 모짜렐라 인더버거 좋아해요

저녁 시간인데도 손님이 딱 외국인 두 분만 계셨다. 부산의 한국 브랜드에서 느끼는 해외의 감성이란.
그리고 이때 쯤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6년만인가?

눈으로는 처음 보는 승리다.
와 이기면 이런 문자도 보내주는구나. 올해는 여기서 싸돌아댕긴다고 편파중계도 다 스킵했는데, 나중에 할 거 없으면 이긴 것만 골라서 봐야겠다.
치열하고 잔잔하게 누군가는 무얼 간절히 얻으려 하고 있었구나. 그러게, 그러한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

마지막으로 부산역 앞 차이나타운의 카페에서 잠깐 앉아 이틀 간의 사진을 정리했다.
개판이다.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뭐, 여행사진이란 게 이렇게 기록으로라도 남기지 않으면 어차피 찾아 보지도 않으니.
보정을 하기에도 너무 많아서(대충 3분의 1정도를 쳐낸 것 중에서 3분의 1을 또 걸러낸 게 여기 올라온 사진들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3. 발문 - 분해는 조립의 역순

부산을 떠나, 대구, 대전, 천안아산, 광명, 그리고 서울.
부산까지 오래걸려 도착했던 게 민망할 정도로 KTX는 밤을 찢고 빠르게 달렸다.
그래서, 무엇이 남았나.

묘한 해방감. 무엇으로부터든 해방이 된 기분이다.
내 가장 큰 적으로 간주하는 잡념으로부터,
어느 순간 무엇보다 큰 가치로 올라서게 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요 근래 기록하지 못할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바닥을 친 내 자존감으로부터,
어영부영 매달리고 붙잡아 나가려고 했던 소중했었던 사람들로부터,
그 모든 번뇌가 바다의 짠내에 섞여 저 먼 동해바다로 섞여 날아갔다.
어쩌면 무릇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현실에서 멀어져 있으니 잠시 그런 것일 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기분을 알고 있는 것 만으로도 미래를 견뎌낼 준비가, 조금은 더 잘 되어가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거리 상의 이유로 다대포 해수욕장에 가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긴 하다.
해 질 녘의 다대포를 보고싶긴 했는데. 여건이 되었다면 하루 정도 더 있다 가고 싶었다.

그렇다고 현실이 뭔가 달라졌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여전히 내 전세금 스노우볼은 굴러가고 있고, 나는 지키기 위한 대책을 빠른 시일 안에 마련해야 한다.
여전히 다음 주는 텝스고, 나는 아직 시험 유형만 겨우 알고 있는 정도다.
여전히 논문 프로젝트는 겨우 초입 단계이고, 나는 아직도 수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날 둘러싼 크고 작은 갈등 관계는 풀릴 기미조차 없고, 나는 아직 그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서울에 돌아온 지금까지도 뭔가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 건, 단순히 여행이라는 변명으로 일상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느꼈던 일시적인 도피 감정이 아니라, 내 현재에서도 무언가 자그마한 것이라도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믿는다.
조금 더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한,

조금 더 뭐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Stars, in your multitudes scarce to be counted,
Filling the darkness with order and light.
You are the sentinels silent and sure,
Keeping watch in the night,
Keeping watch in the night

<Les Miserables, "Stars" by Javert.>



걸리적 여행기 부산 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