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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적 여행기

[230218~230223, 홋카이도 (1) ] 좌우명은 '지옥불에 떨어지면 어떻게든 해낸다' .

온 세상이 얼어붙고
하늘 위 별빛이 다해도
서로를 감싼 새벽들로
겨울 꽃을 피워낼 우리

포르테 디 콰트로, <Winter Lullaby>

나는 지금 구시로에 있다.
일본 홋카이도 구시로.
역에서 내리자 마자 짠내가 훅 들어오고,
바닷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는 그 도시.

일본에 와야겠다 계획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월 초였던가, 언젠가 공항 철도를 탈 일이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동행인들과 공철에 오르는 분들을 보고서, 문득 마지막으로 외국에 나가본 게 얼마나 됐나 싶었다.

그래서 그 날 저녁부터 일본 여행을 추진했다.
기간은 일단 길게. 장소는 그 당시에 친구가 막 다녀왔던 삿포로.
정말 별 이유 없다. 그냥 그렇게 정해졌다.

홋카이도 남쪽 전역으로 스케일이 커진 건 훗날의 일이었다.

그렇게, 회사 인턴과 세종 어셔를 하며 모아두었던 통장 잔고를 탈탈 털어 추는 라스트 댄스가 시작되었다.

 

 

1. 솔직히, 출발이 그리 설레지는 않았다.

 

뿌엑


여행 당일 아침 5시 30분.
전 날까지의 출근으로 일찍 잠에 들었기에 일어나는 게 그리 고되진 않았다.
절대로 전에 부산 갔을 때 늦잠으로 차를 놓쳐봐서 일찍 잔 것 맞다. 이게 지금 얼마짜린데.

2월 말이라고 해도 홋카이도는 눈이 많을 거다. 게다가 일기예보에서는 눈이 계속 온다고 하니, 캐리어를 대신할 잇템을 준비해 두었다.
연구실의 다른 선생님의 추천으로 장만한, 군대에서 요긴하게 썼던 "의류대".
구획은 없지만, 뚜껑은 그냥 대충 여미면 되니 욱여넣으면 보기보다 훨씬 많은 양의 짐을 넣을 수 있고, 튼튼하고, 무엇보다 싸다.


아침 7시. 동이 틀 때 즈음엔 공항 리무진을 타러 가고 있었다.
비행기는 11시였지만, 이 7시 13분 버스 다음 차가 9시 48분 이었기에 전철 환승 지옥을 경험하고 싶지 않으면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가는 비행기를 탈걸.

 

 

요즘 즐겨 듣는 노래 틀고, 출발.

참솜 노래는 감각을 음악으로 들려주는 느낌이라 좋다. Elio, 클로버, 3.14, 멍, rosen, 잊어야 한다는 게, ...

 


토요일 아침에 차가 막힐 리가 없다.

사실 이 땐 지금 상황이 조금 대책이 없지 싶었다. 파워 J라고 하고 다니는 게 무색하게 이번에도 또 무계획이다.
심지어 홋카이도는 처음이다. 게다가 혼자다. 여행 다니면서 쓰는 수준의 영어는 할 수 있지만, 일본어는 고등학교 내신 때 히라가나 외우다가 접었다. 물론 파파고는 깔려있지만, 이번 계획 상의 6일 중 3일이 시골 도시라 간단한 소통조차 안 될 각오를 해야 한다. 무엇을 먹을지는 고사하고, 숙소 주변에 식당이 있긴 한 지, 숙소가 어딘지 조차도 알아보지 않았다.

여행을 자꾸 혼자 다녀서 그런가, J의 본능이 '너 큰일났어' 라며 말해주고 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해외에 혼자 나가보는 건 처음인 주제에.

그렇게 공항에 도착하고, 빠르게 입국 수속을 마친 뒤에,

 

노숙이라도 할까


출국장 게이트 앞에서 멍때리기 시작한 것이 비행 두 시간 전.
일단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카페인 충전하면서 바깥 보면서 20분.
충전기 꽂아놓고 닥터프렌즈 유튜브 보면서 30분.

할 게 너무 없었다. 아침 시간이라 식당도 가게도 다 문을 닫았는데.
짐도 맡기지 않고 다 들고 들어온 탓에 면세점을 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12000원짜리 사리 없는 라면


결국 큰 결심을 내렸다.
아침은 대충 먹고 왔지만 묘하게 허기가 져서 먹을 곳을 찾았다.
처음엔 에그드랍이나 먹을 요량으로 푸드코트에 찾아갔는데, 아까 다른 문을 연 가게가 없었다고 했던가,
그런 간편식 가게는 당연하게도 자리가 없었다.
자리가 남은 곳은 11500원짜리 넘는 남산 돈까스, 그리고 12000원 짜리 육개장.

이 날 저녁을 돈가스로 결정했기에 육개장을 골랐다. 맛은 그냥 공항 맛.

 

이류우우우우우우욱
보다시피 왼쪽 창가 자리였다
착류우우우우우우우욱

신치토세 공항에 거의 다 다라서, 구름 아래로 내려 왔을 땐 정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도 눈, 저기도 눈, 온통 하얀 색이었다.
또 평지가 많은 일본이라, 구름을 뚫고 내려오면서 눈앞에 펼쳐진 설경에 '미친'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오... 나 홋카이도에 왔구나.

미리 준비해 둔 visit japan web의 qr 코드로 우당탕탕 빠르게 입국 수속까지 마쳤다.

전에 왔을 때보다 입국이 좀 더 편해진 것 같긴 한데 솔직히 빨라진 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한국에서 JR 홋카이도 레일패스 5일권을 미리 사왔다. 지정석까지 모두 끊어서.

아니 아까 무계획이라며?

소신발언. 초행길인 사람이 비싼 비행기값 쓰고 혼자 오면서 이정도는 해야지.


아무튼 미리 구매한 JR 바우처를 현지에 도착한 뒤에 패스 티켓으로 교환해야 하는데 데스크를 못 찾아가면 어떡하지 걱정을 정말 많이 했었다. 정보를 좀 두루뭉술하게 찾아봤기에 정확하게 알지를 못했기에.
그러나 역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기는 일본, 영문과 중문 다음에 한국어를 병기하는 나라다.
아니 다 필요 없고 그냥 무지성으로 "JR" 두 글자만 쫒아가더라도 인포 데스크가 나온다.

 

큰 맘 먹고 구매한 레일 패스 5일권. 하루 모자랐지만, 그 날은 삿포로에서 신치토세 공항으로 돌아가는 날이기에 그냥 편도권 끊고 타기로 했다.


신치토세 공항에 사람이 많다기에, 나는 지정석 티켓의 수령처를 모두 삿포로 역으로 지정해 뒀었다.
그러길 잘 했던 것 같은 게, 나중에 가서 보니 지정석 티켓 수령하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게다가 일본식 영어 발음은 내게 좀 낯설어서 티켓을 수령할 때 피차 소통에 어려움이 있기도 했다. 차분하게 지정석 티켓을 받으려면 삿포로역 수령이 확실히 낫지 싶다.

아니 그냥 내가 일본어를 좀 알았다면.

 

삿포로역에 도착하면 서쪽 개찰구로 나가면 된다. 나가서 문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돌면 좀 안쪽, 조금 들어가야 보이는 곳에 JR 인포 데스크가 있다.
패스 뽕을 뽑고자 구입한 지정석들. 이게 이번 여행의 유일한 계획이다.

 

구시로에서 시베차까지 왕복하는 SL 열차(노선? 잘 모르겠다) 인 증기기관차 '겨울의 습원 호' 티켓을 구매하려고 했으나 내가 구시로에 있는 날에는 열차가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이 열차의 티켓은 미리 인터넷 예약이 안되고, 현지에 도착한 뒤에 JR 인포 데스크에서 지정석을 반드시 구매해야 한다. JR 레일패스만 갖고는 탑승할 수가 없다) .
홈페이지에서도 그런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는데.
정말 많이 신경쓴 일정인데다가 취소되어 하루가 붕 뜨게 되었지만, 뭐 이것도 나중에 돌아보면 오히려 좋은 일일지도 모르지.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꼭 이번 여행 뿐만이 아니라, 최근 난 어쩔 수 없는 일에 아쉬움을 두지 않기로 했다. 더이상 애도 아니고, 일이든 사람 마음이든 뭐든 내가 노력했지만 안 된 일이면 그냥 아쉽고 말 일이지.

※ TMI) 홋카이도 패스를 구매했다면 사실 열차들의 지정석은 구매할 필요가 없다. 그 열차는 그냥 패스 티켓으로 개찰구를 통과하는 지하철 느낌이다. 단, 리미티드 익스프레스 ozora나 tokachi 열차를 이용할 때는 지정석을 웬만하면 예약해두자 (대충 패스 끊고 구시로까지 다녀오는 열차가 이거다) . 긴 시간 타야하는 열차인 만큼 자리가 나름 중요할 텐데, 지정석은 5량인데 비해 비지정석은 2량 밖에 안된다.

 

이번 여행의 계획


그렇게, 우당탕탕 하며

 

삿포로역
눈이,,,,,안온다 !


삿포로에 도착했다 !

준비 과정부터 우당탕탕 했기에 제 때 무사히 올 수 있을지부터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데,
알게 모르게 부담이 많았는지 뭔가 해방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욱 더 기분이 좋았던 건,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눈이 안왔다. 게다가 영상 6도 정도로 따뜻했다!
모든 부담이 눈 녹듯 사라지고 이번 여행도 잘 풀릴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2. 아무튼, 삿포로.

 

소리를 담지는 못했지만 대충 한국 발라드 감성. 이쪽 동네가 다 그렇겠지


삿포로역에서 나와 세 걸음 정도 걷자 지금 귀에 들리는 노랫소리가 음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서울의 집에서 출발한지 어언 10시간 만에 도착한 삿포로에서, 긴장이 풀리는 순간의 외국어 노래 버스킹의 맛.
긴장이 설렘으로 확 바뀌는 순간이었다.
부라보 쌍따봉 공중제비를 날려주고 싶었지만 칸코쿠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자제했다. 여긴 한국인이 많을 거 아냐.

도시에도 좀 익숙해 질 겸 숙소까지 좀 걷기로 했다.
숙소는 주로 볼거리가 몰려있는 오도리역이나 스스키노역 주변이 아닌, 걸어서 약 30~40분 정도 위치에 있는 나카지마 공원 근처였다.

 

삿포로역

 

무슨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자 17"


잘은 모르지만 홋카이도 지방은 계획적으로 타지 사람들을 이주시킨 곳이라고 대충 알고 있다.

그런 계획도시의 명성에 걸맞게, 삿포로 도로의 모습은 네모 반듯반듯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덜 도심인데, 약간 광주의 금남로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건물들이 작지는 않지만, 조금 오래된 느낌이랄까.

그리고 이때 쯤 하나 자각한 게 있는데,
온갖 상념과 자아성찰의 시간으로 범벅된 지난 부산 여행때와는 달리 이 날은 걸어다니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눈 앞에 있는 것들에 "오...." 하고 있는 걸 보면서, 요즘 내가 확실히 마음도 편해지고 살기 좋구나 싶었다.

 

지난 가을부터, 나름대로 부담을 내려 놓고자 여러가지 시도를 해 봤다. 많은 일들을 해치웠고, 많은 걸 내려놓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무언가에 몰두도 해보려고 했다.

랩실에서 공부해야 할 것들에 치여 산 것도 나름 좋은 자극이 되었던 것 같네.

 


삿포로의 제설은 딱 '다니기에 불편하지만 않을 정도로' 만 된 느낌이었다.
게다가, 지리를 잘 몰라서 잘은 모르지만, 뭔가 밟기에 나쁘지 않은 눈이었다.
단단하긴 한데 많이 미끄럽진 않고, 한국의 눈과 달리 축축하거나 그런 게 덜 한 것 같달까.

아 물론, 이 날은 상술했듯이 영상으로 꽤나 높은 기온이라서 도로 곳곳에 눈 녹은 시커먼 웅덩이가 많았다. 졸지에 지뢰 피하기.
그럼에도 삿포로 네이티브 분들은 첼시부츠나 워커같은 걸 신고도 이 빙판길을 보지도 않고서 퍽 퍽 거침없이 걸어다니는 게 꽤나 인상적이었다.

 

우체통 귀여워서.
홋카이도청은 23년 2월에는, 아직도 공사중이었다.
하지만 청사 앞의 눈사람은 귀엽지.
인도(였던 것)
여기서 저기 건너가야 하는데 눈 때문에 막힘

이 눈은 누가 다 치웠을까.

확실한 건, 홋카이도에서는 무단횡단은 꿈도 못꾼다. 횡단보도가 아닌 모든 인도와 도로 사이가 저런 눈더미로 막혀 있다.

 

다누키코지 상점가. 나중에 돌아다녀 봐야겠다


사실 삿포로의 일정은 며칠 뒤에 하루 따로 예정되어 있다.
그 때 좀 더 구석구석 돌아보는 걸로 하고, 이 날은 일단 숙소까지 쭉 걸어 보기로 했다.

 

삿포로 티비타워. 전망대가 있는 명소인데 방향 잡기에 좋다.
지도 안보고 막 걸어오다가 잘못 들어와버린 유흥의 거리. 유교 맨은 후다닥 도망가는 중이다.
뭔진 모르겠는데 일단 멋있음


한 30분쯤 걸었나, 가방이 슬슬 그만 걷고싶다 생각이 들 때 즈음 나카지마 공원에 들어왔다.
짐을 다 들고 가고 있는 데다가 얼음과 물이 뒤섞인 땅을 열심히 보고 피하느라 피로도가 두배로 쌓이는 것 같았다. 이 근처가 숙소였는데. 그냥 전철을 탈걸 그랬나.

 

나카지마 공원 초입
이 눈 아래가 흙일지 잔디일지 아스팔트일지 상상이 안된다
아마도 눈 축제의 잔해...? 저번 주가 삿포로 눈 축제였다. 아마 토토로의 고양이 택시와, 멀리 있는 저 네모진 건 미피.
이렇게 보니까 별로 안 이쁜데 싶을 수 있지만 실제로도 안 이뻤다


공원 안쪽 중간 중간에 이런 이정표가 있어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 알 수 있기는 개뿔
구글지도 만세.

 

이러니까 진짜 별로인 것 같은데 실제론 나름 둘러보면서 산책하기 좋은 뷰였다. 진짜로
사진을 뭣같이 못 찍었지만 길 양 옆으로 치워둔 눈이 쌓인 높이가 허리 정도까지 온다. 1미터는 되는 듯
일부러 안보이게 찍었지만, 애기들 뛰어노는 게 너무 귀여웠다
이 아래가 아마 호수겠지.

 

확실히, 삿포로는 어디선가 본 도시의 이국적인 버전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현지인 분들, 패딩 잘 안입으시는 것 같다. 일단 롱패딩은 나만 입은 것 같음.

 

저 멀리 보이는 다리 있는 데가 강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에 료칸을 넣어볼까 고민을 많이 해봤지만, 기차를 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돌아다니는 컨셉 사이에 끼워 넣기가 좀 애매해 결국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숙소를 비즈니스 호텔로 잡았다. 예전에 회사 인턴 다니던 때 즈음 부터 가장 익숙한 숙박 시설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게하는 가봤지만 좀 아웃 오브 취향이다.

 

오늘의 집
원룸 n년차 자취생에게 이정도는 좁은 것도 아니다

전형적인, 넓지 않은 일본 도심의 비즈니스 호텔이었다. 그러나 한국이었으면 모텔 값도 안되는 가격이었으니까, 꽤나 만족스러웠다.

 

ㄱ로비 층의 조식 식당. 조식은 무료 제공이었으나, 난 조식 시간이 끝나기 전에 체크아웃 했다
기타 어매니티. 커피와 차, 생수 등이 제공되는 테이블이다.
이렇게 경계선으로 정확히 나눠 제설된 게 신기했다

 

※ TMI) 일본 비즈니스 호텔의 웰컴 드링크와 어매니티들은 주로 로비 층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 필요한 물품은 적당히 챙겨 가자. 또한 신사적인 일본 분들은 큰 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데다가 코로롱 전파 방지를 위한 칸막이 때문에 소통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니, 체크인 할 때는 자신 없다면 그냥 예약 내역과 여권만 조용히 들이밀자. 알아서 해주신다.

 

뭔가 신호등 그냥 신호등
슬슬 밥.
....밥.
이 ㄱㅐ같은 놈 바로 아래 지나갈 때 전광판이 쾅! 하고 켜지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빙판에 미끄러질 뻔

 

슬슬 저녁을 먹으러 가야 했다. 아침에 공항 육개장을 먹은 뒤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심지어 물 조차도.

마치 제갈량의 주머니를 하나씩 풀어보는 느낌으로, 얼마 전 친구가 추천해 준 돈가스 집을 찾았다.

 

평소 나는 돈가스를 꽤 자주 먹는 편인 것 같은데, 경양식은 거의 먹지 않는다. 나에게 돈가스란 일식 뿐이다.

이 날 들른 식당은 "돈카츠 아오키" . 분명 리뷰에서는 한국어 메뉴판을 주셨다는데, 어물쩡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1인석에 앉아서 그런가, 내가 받은 건 그냥 일본어 메뉴판이었다.

 

나 일본어 못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내 인생에서 일본어란 히라가나를 외우다 포기한 그런 꼬불랭이일 뿐이다.

이번 여행을 위해 연습해 간 일본어도,

 

"토이레와 도코데스까 (화장실 어딥니까)"

"코레 히토츠 구다사이 (이거 하나 주세요)"

"부쿠로 구다사이 (봉투 주세요 ; 편의점에서 쓰려고 배워 왔다)"

 

가 끝이었다.

 

하지만 나, 파워 J 갓ㅡ자라는 이런 상황도 준비해 두었다. 당황하지 않고 미리 봐 두었던 메뉴를 당당히 가리키며 "코레, 히토츠, 구다사이." 를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저기 위 메뉴판 사진에서 빛나고 있는 메뉴인데, 원래 난 히레카츠(안심)파 지만 이 식당에서는 등심이 맛있다고 해서 그것 큰 놈으로 주문했다.

다행히 척 하면 척 알아 들으시는 직원 분께서 하ㅡ잇 을 외쳐 주셨다. 나 진짜 이 "하잇" 이 왜 그렇게 마음이 편해지는지 모르겠어.

 

근데 분명 블로그에선 저 메뉴가 2천엔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도 물가가 올랐나?

 

1인석의 기본 세팅.

 

파파고가 사진 찍은 것도 번역해주는 것 알고 있었습니까.

굉장히 유용한 게, 번역이 완벽하지 않아도 맥락만 읽어주면 나머지는 센스로 커버할 수 있다.

 

옆자리에서 식사중이셨던 신사분께서도 저 히말라야 솔트만 뿌려 드시길래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싶었다. 따로 안내문까지 붙여 둘 정도면 제일 궁합이 잘 맞는 놈이려니.

 

근데 아이를 가지세요는 뭘 본걸까.

 

이렇게 봐서 별로 안 커보이는데 저거 고기만 반 근 짜리다. 300g.

 

아니 내가 카레를 주문했어?

200엔 추가로 붙은 게 아무래도 카레였나보다. 일식 카레 좋지. 2000원이면 한국보다 싸네.

 

구성은 생각보다 간단했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양은 많아 보였다.

그것 외에는 겉보기에 딱히 독특한 비주얼은 아니었던지라, 반신 반의하며 레몬을 뿌렸다.

 

튀김 옷은 얇다

 

나 진짜 이제 한국에서 단골집 일식 돈가스 못 먹을 것 같다.

음, 고기가 일단 두툼하고 촉촉하다. 돼지 튀김이 아니라 돼지고기 스테이크를 씹는 느낌.

한 입에 한 조각을 다 물기엔 꽤 커서 반씩 베어 먹었는데, 육즙이 흘러 나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자리에 준비된 여러가지 소금과의 궁합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고기 자체의 간은 약한 편이었다.

짠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 입맛에는 약간의 소금으로 풍미만 더해주고 고기 맛으로 입 안 가득 채울 수 있어 더 좋았다.

 

사람 따라서는 생각보다 고기 자체가 기름지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왜 내가 들어온 뒤로 웨이팅이 생기기 시작했는지 납득이 되는 맛이었다. 아 물론 비싸긴 하지만.

 

배가 많이 고팠던 나머지, 정신을 차려보니 그릇이 싹 비워져 있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내고 밤거리로 나왔을 때,

 

첫 끼부터 만족스러웠던 나머지 흔들리는 앵글

 

오도리역 근처까지 다시 나왔는데 이대로 들어가자니, 입 안에 아직 남아있는 돼지고기의 풍미가 아까운 느낌이었다.

여기 일본이잖아. 큰 맘먹고 왔는데 피곤해도 돌아다녀야지, 라고 SPF 돼지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저 식당에서 이 품종을 썼다고 한다) .

 

지도를 켰다. 일단 시계탑이 근처에 있네, 거기부터 가보자.

 

일본에서의 프로 하이커로서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봄 되면 이 구도가 되게 이쁠 것 같은데.

 

소신발언.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종로쪽 걷다 보면 하나씩 튀어 나오는 근대식 건물, 그 느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쁘긴 한데 특별하진 않은 느낌이랄까.

게다가 인도도 좁은데 거기다 포토스팟을 만들어 둬서 통행에 방해되게 만든 것도 은근히 불편했다 (그래서 그 구도의 사진이 없다).

 

아마 내가 혼자 온 시커먼 아저씨라 괜히 그런가보다.

 

운영 시간이 끝났다고 알고 있는데 건물 문이 열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2층에서 뭔가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까 "코레, 히토츠, 구다사이" 도 겨우 해낸 주제에 네이티브 천국으로 뛰어 들어갈 자신은 없었다. 계단을 반쯤 올라가다가 한 세 분 정도와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도망나왔다.

 

 

그렇게 삿포로 밤거리의 조용한 활기를 즐기며 숙소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문득 왔던 길과 다른 길로 가다가 다시 만난 TV타워.

해가 진 뒤의 TV 타워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반짝거리는 건 한쪽 면 뿐이었지만.

 

애매한 거리에서 찍기엔 아무래도 사진이 맘에 안들게만 나와서 가까이 가보자 했다. 어차피 밤은 길다.

 

사물이 사진에 보이는 것 보다 더 큼

 

이런 류의 타워야 어느 도시를 가든 하나쯤은 있으니까, 사실 별 감흥은 없었다.

전망대에는 500엔 이하면 올라가 볼 의향이 있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런 낭만을 겨우 그정도 가격만 받을 리가.

 

입구로 들어서면, 매표소까지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국토의 70 퍼센트가 산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단련된 강한 하체의 칸코쿠가 아닌가.

매표소가 3층이라길래 만만히 보고서 계단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일본의 숫자는 우리나라와 다른가보다

 

이 미친 나라ㅂㄷ 이런거면 6층이라고 써놨어야지

위의 그림에 있는 하얀색 인간이 현 위치다. 저 수박같이 생긴 캐릭터도 킹받게 생겨가지고 ㅇㅏ오

 

걸어 올라온 게 억울해서 쿨하게 1000엔을 쾌척하고 전망대로 오르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사방이 뚫린 좁은 엘리베이터에는 나를 포함해 혼자 오신 건장한 성인 남성 세 사람이 탑승했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 구석지를 한 자리씩 차지하고 섰다.

 

나중에 전망대에 가서 안 사실인데, 한중일이 만난 순간이었다.

 

진짜 개애애애ㅐㅐㅐㅐㅐ무섭다

 

와 이런거 타보면서 단 한번도 무섭단 생각 안해봤는데.

뭔가 묘하게 덜커덩 거려서 그런지 진짜 무서웠다. 같이 계신 남성분들 아니었으면 주저 앉았을 듯.

 

엘리베이터 안에는 일본어로 무언가 소개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아마 남산타워 전망대 올라갈 때 나오는 그런 류의 방송인 것 같은데,

 

모르겠고 무서우니까 빨리 내려줘요

 

갤럭시 카메라로 캡쳐해왔어용. 맞춰 볼 수 있으면 맞춰서 보시길
킹받는 티켓

 

와, 난 삿포로를 위에서 보면 이런 모습일지 걸어다니면서도 상상을 못했다.

그래도 꽤 많은 곳을 발로 때워 와봤어서, 대충 좀 길의 분위기를 보면 어느정도 그림이 그려지기 마련인데,

예상치도 않은 번쩍번쩍한 풍경이 펼쳐져서 꽤나 놀랐다.

이정도 낭만이면 올라와볼만 한데. 가격은... 뭐 돈 쓰러 온거니까 아깝진 않았다.

 

" 겁 창 "

 

뭐 한쪽 유리가 열릴 것 같이 생겨놔서 일본어로 뭐가 써 있길래 파파고한테 물어보았다.

수박 주제에 한국의 상남자를 도발하는구나. 불닭볶음면 보유국의 매운맛을 보여주마.

 

어라라 퇴각

 

이게 유리가 바깥으로 사선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서있는 바닥과 150도 정도의 둔각을 이루는 구조다.

그래서 그런지, 안전 장치 없이 난간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런 기분이 든다.

 

나이가 쌓여가면서 잃을 게 점점 많아져서 그런지, 나 이런 게 무서워하네 (?) .

 

수박?바나나? 아무튼 절대 타워처럼 생기진 않은 이 녀석도 묘하게 보다보니까 매력적인 것 같기도.
전망대의 다른 쪽 방향
옆에 세균맨도 있다
진짜 하찮게 생겨서 취향저격당함
개귀여워

전망대가 항상 그렇듯 기념품도 판다.

저 오목눈이(뱁새)는 홋카이도의 마스코트정도 되는 새 인것 같은데, 동글동글한게 진짜 너무 귀엽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3층(6층)으로 내려왔다

올라가면서는 몰랐는데 뭐 다양한 게 있더라고.

 

밤은 길다, 온 김에 매표소 층에 마련된 기념품 샵도 둘러 보기로 했다. 맘에 드는 거 있음 좀 사지 뭐.

 

악...
아악...

 

얘네 진짜 너무 귀여운데, 나중에 다시 삿포로 돌아올 때까지 돈이 남아 있으면 하나 사가야겠다.

 

엄청나게 강력해 보이는 티셔츠. 대충 큰 곰이 티비타워를 부수고 있는 프린팅
대체 뭘까
이딴게 2만원이면 차라리 진짜 생선을 사고 말겠다

 

이 동네 티비 프로그램에서 하는 건가.

오목눈이 말고는 대부분 이게 대체 뭔가 싶은 것들이 많았다. J-감성이 듬뿍듬뿍.

 

티비 타워를 나와 슬슬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뭔가 일본 도심의 흔들리는 감성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과는 다르게 소세이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보기로 했다.

말이 강이지, 대충 성북천같은 느낌이었다. 청계천 정도도 안되는.

 

※ TMI) 삿포로의 많은 관광 시설들은 17시, 혹은 18시에 문을 닫는다. 어딘가를 들러 계획대로 모든 액티비티를 체험해보고 싶다면 아무리 늦어도 16시까지는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해보자. 해가 진 이후에는 식당밖에 없다.

 

눈은 많은데 솔직히 서울보다 춥진 않다
문 닫은 카페에서 나처럼 우당탕탕 겨우 앉아만 있는 병약한 눈사람을 발견했다. 꽤 맘에 들었음

 

아, 혼자 여행의 묘미는 또 걱정없이 가볍게 즐기는 맥주 한 캔이지.

사실 일본에 오면 꼭 먹어주는 필수 코스가 있다.

 

대-로손 스떼이숀

 

한국에 수입이 되지 않는 캔맥주중에 정말 좋아하는 것이 있다.

(삿포로 클래식은 이때까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아니다)

 

무려 삿포로 클래식을 포기하고 선택한, 광기의 빙결.

 

로손을 꼭 들르는 이유는 기린 빙결과 가라아게군 레드 조합으로 야식을 해치우기 위해서이지만, 저녁으로 돈가스를 야무지게 먹었던 터라 가라아게군이 별로 끌리지 않았다.

 

대신 배지밀마냥 생긴 콩 과자를 선택했는데,

 

뚜루뚜 산와 산와

생긴 건 식욕 떨어지게 생겼어도 보기와는 다르게 횟집 스끼다시로 나오는 완두콩같은 맛이다.

빙결과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피곤했던 터라 간단히 밤을 마무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에는 긴 기차 여정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3. 아니 그냥 대놓고 우당탕탕

 

벼락치기 공부중

출근하던 습관때문인지 알람도 없이 7시에 눈이 떠졌다.

기차는 정오가 조금 못 되어서다. 지금 준비하고 나간다면 적당히 어딘가 둘러볼 수 있을 거고, 아니면 호텔에서 조금 더 쉬어도 될 것이다.

 

아침 식사. 미역이 들어가 짭짤한 주먹밥과, 생딸기 조각이 씹히는 딸기우유, 그리고 부라쿠 코오히.

 

30분 정도 뒹굴거려 봤지만 너무 심심했다. 이럴거면 편하게 서울 집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말지 뭐하러 여기까지 왔나.

씻고 짐을 싸고 체크아웃을 한 것이 9시가 되기 전이었다.

 

삿포로의 비둘기 포지션은 까마귀가 담당하고 있는 듯 했다
아침의 나카지마 공원
일요일 아침의 한산한 삿포로
다시 삿포로역

 

기차는 어차피 삿포로역에서 탄다. 내가 탈 OZORA 열차는 삿포로와 쿠시로 사이를 오가는 특급 열차다.

삿포로역에 코인 락커룸이 있으니, 거기에 짐을 몇 시간 맡겨두고서 다음을 생각할 요령이었다. 점심을 먹지 않고 기차를 타자니 점심을 굶는 꼴이라, 음식 맛이 좋기로 유명한 홋카이도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사실 적당한 장어덮밥 가게를 전날 밤에 한 군데 찾아본 터였지만, 시간이 애매했다.

11시에 문을 여는 식당에서, 오픈런을 한다고 한들 50분 안에 식사를 마치고 삿포로역까지 돌아와서 짐을 찾은 뒤 알맞은 승차홈을 찾아서 열차에 탑승할 수 있을지 좀 의문이었다. 심지어 초행길인데.

 

그런 고민을 하고있을 무렵, 삿포로역에는 백화점이 딸려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스텔라 플레이스, 다이무라 삿포로, 에스타, JR 타워.

 

좋아, 오늘은 여기다. 식사까지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선택지였다.

 

삿포로역 코인 락커의 기본적인 조작은 이 터치스크린으로 할 수 있다
한국어 패치 좋아용

기내용 수하물이면 대략 400엔짜리 락커에도 충분히 들어갈만 한 것 같다.

내 의류대가 들어가고도 공간이 좀 남았으니.

 

짐을 맡기고, 남은 3시간을 때우러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세상에 포켓몬센터가 있었어?

 

현생에서 열심히 일코를 하고 살았지만, 아니 실제로 이제는 일반인이 되어버렸지만, 어렸을때 난 포켓몬을 굉장히 좋아했다.

단순히 친구들이랑 게임하고 좋아했던 건 물론이고, 지금보다 몇 세대 전 게임기 시절 네이버 모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카페에서 개최한 대회들에 참가해서 16강의 성적을 거두고, 배포 포켓몬 한 번 구해보겠다고 친구들 꼬셔서 영화까지 보러 다닐 정도로 진심이었다. 닌텐도 스위치로 넘어갈 때 즈음 완전히 게임을 놔버렸지만.

 

그 급식 먹던 시절의 자라놈이 일본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이유가 포켓몬 센터 때문이었는데.

성인이 된 이후 일본을 처음 온 것도 아니지만, 포켓몬 센터를 가볼 생각이 한 번도 없었던 건 아이러니다.

 

아무튼 이 기회에 구경이나 해보자 싶었다.

 

인형 외에도 다양한 액세서리를 취급하고 있었다

 

별로 크진 않았지만, 게다가 삿포로의 모든 잼민이들을 다 불러온 것 마냥 미어 터졌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웬만한 메이저 포켓몬들 외의 많은 종류를 다루고 있어 가슴이 뛰었다. 그래, 아저씨한테는 피카츄만 포켓몬이 아니란 말야.

최근에 나온 놈들은 하나도 모르겠지만, 저 위에 잠자고 있는 고라파덕이나 소리지르는 야돈같은 것, 너무 귀엽잖아.
진짜 조금만 더 있으면 눈알이 돌아버릴 것 같아서, 딱 하나만 사가자 싶었다.

 

누오

 

예전부터 좋아하던 녀석인데, 대충 얼레벌레 사는데 뭔가 굉장한 친구라 내 가치관과 합치되는(?) 면이 있어 이녀석으로 결정했다.

 

키가 내 허리만도 안 오는 일본 꼬마 신사숙녀분들 사이에 줄을 서고 있자니 현타가 굉장히 쎄게 왔지만, 그래도 하고싶은 거 다 하고 가야지 뭐. 어차피 여기 아는 사람도 없는데.

 

계산해주시는 점원 분께서도, 말도 똑바로 못하고 어우으어어 돈만 내미는 날 보면서 이샛기는 히키코모리가 분명하다 생각하셨을 지도 모른다 (웬만한 곳을 돌아다닐 땐 난 영어를 쓰지 않는다. 써도 안통할 것 같아서).

그럼에도 웃으면서 어떻게든 소통하려 하셨던 베테랑 점원분께 무한한 감사를.

 

그렇게 의외로 이번 여행의 동료가 늘어나 버렸다. 예상보다 빨리.

 

겨우 정신줄을 부여잡고, 다른 층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이런 일본 풍의 도자기나 기모노만을 따로 다루는 층이 있었다
일본의 패션은 한국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DP 상품들의 바지 통이 남녀 할 것 없이 겁나게 좁았다.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 푸드코트 층에서 슬슬 식사를 골라야 했다.

빨리 나오고, 충분히 즐기며 먹을 수 있는 것으로.

 

 

그렇게 꽤 적당해보이는 메뉴를 발견했다.

가격은 생각보다 꽤 있지만, 백화점이니까 뭐. 한국 백화점이었으면 더 비쌌을 거다, 라고 합리화했다.

 

 

입구를 보니 포켓몬센터 바로 옆에 있는 식당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외출한 부모님들께서 줄을 기다리며 식당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와서 다행이다.

 

생각보다 고급지다

 

오픈 전부터 주방 분들께서 열심히 소스를 볶고 계시던데, 역시나 요리가 굉장히 빨리 나와 주었다.

버섯 소스 오므라이스라고 하지만, 계란이 오믈렛처럼 푹신푹신한 느낌.

소스는 특별할 것 없는 백화점의 맛이었지만, 계란이 촉촉하고 소스 양도 충분해서 꽤 맛있었다.

 

기차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승차권을 옆에 두고서 식사를 하는 모습. 극성이다

 

생각보다 여유롭게 식사를 끝마치고 삿포로 역으로 내려갔다.

개찰구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특별한 안내를 찾아볼 수가 없었기에, 혹시나 승차홈을 제대로 못찾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누가 봐도 아랫놈

 

다행히 승차홈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본어 말고도 영어로도 열심히 "여기예요"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타는 열차 이름이 "OZORA 5" 라는 것과 승차 시간만 알고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삿포로역 승차홈, 한국의 KTX 역 처럼 뻥 뚫려 있다.
리뉴얼되면서 KTX 모양을 따라가는 한국의 열차들과는 달리,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어 열차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역시 디지몬 프론티어의 나라

 

승차홈으로 올라와서 눈높이 위의 어지럽게 걸린 전선을 잘 보면 탑승하는 열차의 종류에 따라 현재 서있는 위치가 몇번째 칸인지 표시되어 있었다. 왜, 한국의 KTX역도 가서 보면 "5/6호차" 이런 식으로 걸려 있지 않은가.

아무튼, 홋카이도에서는 일본어를 한 글자도 모른다고 해도 도시간의 이동에 무리는 없을 정도다.

 

그리고 이 승차홈에서부터 더 이상 주변 사람들에게 한국어가 들려오지 않았다.

 

타자마자 옆자리에 건장한 외국 남성분께서 앉으셔서 구시로까지 함께했다

 

그렇게 장장 4시간의 여정이 시작됐다.

 

 

 

<사진이 너무 많아져 문서 분리를 하겠습니당. 이어서 계속>